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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가   집무실을   나가고,   오   분   정도가   지나서야   나는   겨우내   호흡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나를   속박하던   모종의   마력이   드디어   흩어진   것이다.

나는   목의   브로치를   풀어헤치고   급하게   호흡을   들이쉰   다음   이마를   짚었다.   저도   모르게   등허리에   오한이   서리면서   머리가   아파온다.

엘프의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이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아랫배를   어루만지게   만든   감촉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다.

─   주인님의   성욕을   푸는   곳은,   이곳에   있어요.

……다시금   생각해보면   전혀   의미심장하지   않았다.

완곡하게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다음   매도   때는   자신을   범하라고   명령하고   있지   않은가.

‘말을   듣지   않으면   무슨   꼴을   당할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엘프와   성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잇새를   빠져나온   침음이   나를   무겁게   내리누른다.

각오는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엘프에게   당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실리에게   미리   말하여   각오를   다져두지   않았던가.

그러나   자신감이   없었다.   나는   엘프가   내게   원하는   ‘냉혈한   사이코패스   주인님’을   성관계   도중에서   계속   유지할   깜냥이   되질   않는다.

지금까지의   매도는   대부분   말과   도구에   의존한   것이지   내   몸을   통해   만족시켜준   것이   아니다.

과연   내   몸에   엘프가   만족할   것인가?   나는   그게   무척이나   두려웠다.

‘……해본   적   없단   말이다.’

생각해보라!   다시   말하지만   엘프가   내게   원하는   역할은   ‘냉혈한   사이코패스   주인님’이다.

이런   주인님이   막상   성관계에   들어가니   제대로   리드하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한다면?

전혀   절륜하지   않다.   유능하지   않다.   냉혈하지도   않고   사이코패스도   아니다.

내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엘프는   관계   도중에   분명   나를   싫어하게   될   것이다.   나를   싫어하게   된다는   것은   곧…….

식은땀을   흘린   내가   안면을   쓸어내렸다.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내려주시는   겁니까…….’

지금만큼은   베이넌이   되고   싶었다.   오크도   따먹는   그   미친   정력과   담력이   부러웠다.

“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냐고!   베이넌   이   자식은!”

와락   소리치자   문이   벌컥   열린다.   까칠한   턱수염이   인상적인   베이넌이   집무실에   들어와서   소리쳤다.

“도련님!”

“어,   어?   방금은   네게   화가   나서   한   말이   아니다.   오해하지   말고…….”

“예?   무슨   소리십니까.   아무튼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왜   저러지?   가만히   보니   뭔가   다급해보인다.

내가   자세를   바로잡고   되물었다.

“흥분하지   말고   말해라.   저택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나?”

“하,   그러니까   그게…….”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인   베이넌이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주교님이   도주하셨답니다.”

“도주?”

“예.   도련님이   아끼시는   엘프   노예   있지   않습니까?   목격한   사용인에게   물어보니   주교님이   그   녀석을   데리고   저택   인근의   숲으로   달아나는   걸   봤답니다.”

“아니,   왜?”

“저도   잘   모릅니다.   아마   무슨   오해를   하신   거   같은데…….   일이   커지기   전에   일단   주교님을   찾아가서   설득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베이넌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엘프를   데려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지금의   엘프에게   혹여   밉보인다면   주교님은   필시   죽는다.

엘프를   저택에   들인   게   나인   이상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내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외쳤다.

“사용인들에게   횃불을   전해주어   인근   숲을   샅샅이   살피라   전하고,   말   두   필을   준비해라!   베이넌   너는   나와   함께   간다!”

“예.   도련님!”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베이넌이   뒤돌아   뛰어간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기에,   나   또한   외투를   껴입고   빠르게   집무실을   나섰다.

“제가   지도에서   본   바로는   이쪽입니다……!”

레비함이   열심히   숲을   가로지른다.

엘프는   그   뒤편에서   레비함을   따라   느긋하게   걸었다.

땀을   삐질   흘려가며   숲을   거니는   레비함을   보고   있으니   한심함이   절로   일어난다.

‘바본가.’

레비함의   계획은   간결했다.

테오라드   몰래   저택을   빠져나온   후   인근   숲을   빠르게   가로질러   성당에   도착하자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으니까.

일단   성당에   들어가기만   하면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적용되기   때문에   제아무리   강대한   가문이라도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이   레비함의   지론이었다.

엘프가   보기에도   계획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어보였다.

문제는   레비함이   지켜주겠다고   선언한   엘프가,   교단의   도움을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   주교님,   지금   도망쳐야   해요!

엘프는   저택을   빠져나올   때   일부러   큰   목소리로   소란을   피웠다.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들켜서   테오라드가   이   사실을   알아차리게끔.

그럼으로   테오라드를   골려주고   싶었다.

‘내가   성당으로   끌려가는   순간   일이   커지게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쪽을   구하러   올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테오라드가   교단에   자신을   떠맡기는   것으로   자유를   보장받으려   한다면   진심으로   화가   날   것   같았다.

테오라드가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부류는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이   묘하게   기분을   불쾌하게   만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올   때가   됐는데.’

레비함이   숲을   헤매며   헛짓거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이제는   지겨웠다.

테오라드가   언제   오나   싶어서   뒤편을   힐끔힐끔   돌아보았지만   보이는   건   없었다.   들리는   소리도   없으니   아직까지도   이쪽을   찾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슬슬   해가   저물고   있는데.   엘프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리자   레비함의   어깨가   움찔   떨린다.   자신에게   한   말로   오해한   것이다.

“이,   이쪽이   아닌가……?”

조금   전까지   기세   좋게   ‘당신을   지켜주겠다’라고   말한   것   치고는   다소   허술한   반응이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비슷한   나무가   줄지어   늘어져있는   숲에서   방향감각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으니까.

거기다   레비함은   성당에서   예배와   미사나   드리던   사람이지   숲을   뛰어다니며   생태를   파악하는   사냥꾼이   아니었다.

숙달된   사냥꾼도   오래   다녀   익숙한   숲이   아니면   길을   잃기   십상인데,   기껏해야   지도를   통해   저택의   주변   지리를   파악한   레비함이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대로   가다간   저녁   내내   이   모자란   녀석과   함께해야   할지도   모른다.   짜증스러움에   눈살을   찌푸리던   엘프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귀를   쫑긋거렸다.

‘이건…….’

말발굽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소리는   점차   커지고   커져서,   레비함마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말도   안   되는…….   벌써   이쪽을   쫓아왔단   말인가?”

벌써라니?   이   녀석은   양심이   없는   걸까.

숲에서   한참을   헤매놓고   하는   소리치고는   참으로   건방지다.

“어서   대비를,   대비를   해야   합니다!”

당황한   레비함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엘프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엘프가   레비함을   흘겨보며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싫어.”

이후   요지부동으로   가만히   있으니   얼마가지   않아   두   마리의   말이   수풀을   헤치고   뛰어들었다.

말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은   베이넌과   테오라드였다.

히이이잉─!

급하게   말고삐를   잡아당긴   테오라드가   거친   호흡   속에서   소리쳤다.

“주교님!   엘프는   제   노예입니다!   아무리   주교님이라   할지라도   제   노예를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덕분에,   엘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귀여워.’

하나   지금의   상황에서   만족스러운   것은   단언컨대   엘프뿐이었다.

테오라드는   복잡한   심경으로   안장에서   뛰어내려   레비함에게   다가갔다.   뒤이어   베이넌이   말에서   내려   테오라드를   뒤따른다.

“주교님.   제가   보기에는   주교님이   무언가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왜   제   노예를   데리고   숲으로   도주하신   건지   사유를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지극히   인도적인   질문이었으나,   테오라드를   마녀들의   앞잡이로   생각하고   있는   레비함에게는   가면을   쓴   예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해라니…….   테오라드   자작!   대체   언제까지   저를   속이실   겁니까!   교단을   향한   적의를   끝까지   숨기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예?   무슨   말씀이신지…….”

“다   보았습니다!   당신이   독월   조합장의   수정구를   받은   사실을요!   이래도   계속해서   변명을   하실   셈이십니까!”

아니,   수정구가   독월   조합장의   것이라는   걸   대체   어떻게   알았단   소린가……?

테오라드가   베이넌을   돌아보았지만,   베이넌은   자기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들키긴   들킨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교단에   악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오해다!   테오라드가   진심을   담아   간절하게   말했다.

“독월   조합장과   거래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교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건   아닙니다.   부디   믿어주십시오.”

“믿어달라?   그럼   독월   조합장과   무슨   거래를   했는지   말해보십시오!”

“아.   그건…….”

테오라드가   머뭇거렸다.

그도   그럴게   ‘복용하면   모유가   나오는   알약과   온갖   성인용품을   샀습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사회적   자살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때문에,   자세한   내막을   알   리가   없는   레비함은   테오라드의   머뭇거림을   거짓말의   발로라고   받아들였다.

“역시.   당신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교단에   접근하여   선심을   내보인   것이군요.   교단에   호의를   쌓아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의심을   지우기   위함이었겠습니다.”

“주교님.   그런   게   아니라…….”

“더는   변명하지   마십시오.   이   엘프도   당신의   계획에   이용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니   저는   있는   힘을   다해   당신을   막아설   겁니다.”

얽혀버린   실타래가   더욱   더   헝클어진다.   말로는   도저히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은   테오라드는   하는   수   없이   베이넌에게   명령했다.

“주교님을   포박하라.”

베이넌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예?   도련님?   진심이십니까?”

“그래.   이대로   성당에   가시게   둘   수는   없다.”

어떻게든   저택으로   데리고   간   다음에,   엘프가   없는   곳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베이넌의   입장에서는   테오라드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따를   수가   없었다.   어떻게   봐도   불합리한   처사였기   때문이다.

“도련님.   주교님에게   손을   대게   되면   자칫   종교   재판이   열릴   수도   있습니다.   감수하실   수   있으십니까?”

지금   그딴   게   중요한가!   주교님이   죽게   생겼는데!

“뒷일은   생각하지   마라.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정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스릉.   베이넌이   검집에서   검을   꺼내들었다.   검집의   허름한   외양과는   달리   날이   잘   갈려진   검신이   서슬   퍼런   기운을   흩뿌린다.

베이넌이   검법을   취하자   레비함의   동공이   한차례   흔들렸다.

‘이렇게까지   강압적으로   나온단   말인가.’

잠시   놀란   레비함은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독월   조합장과   유착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눈앞의   테오라드였으니,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순순히   잡혀갈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십니다.”

레비함의   몸   주변이   황금빛   색채로   물든다.   신을   믿는   성직자들만   사용할   수   있다는   신성   마법을   사용할   심산이었다.

신성   마법을   사용하는   성직자를   베이넌이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승패를   가늠할   수   없음에   테오라드가   침음을   흘리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   상황에서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부디   저를   믿고   저택으로   돌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주교님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싶지   않습니다.”

“하.   그   말은   제가   저항하는   순간   저를   죽이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아니라   엘프가   주교님을   죽일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소리치고   싶은   말이   입천장까지   닿았으나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레비함의   뒤편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엘프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하나   엘프는   테오라드가   생각하는   것처럼   레비함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적당히   가지고   놀다가   버릴   패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음.’

그리고   지금.   엘프는   레비함을   버려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정도면   테오라드를   충분히   혼내준   것   같으니까.’

교단과   가문이   엮이면   골치가   아파진다.   더구나   레비함이   신성   마법을   남발하는   도중   테오라드가   상처를   입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제대로   된   유희를   즐기지도   못했는데   장난감이   물리적으로   고장   나는   게   좋을   리가   없지   않은가.   별   수가   없었음으로   엘프가   레비함에게   사뿐히   걸어갔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   레비함은   테오라드를   향해   신성력을   한껏   끌어올리고   있었다.

“제가   신을   대신하여   당신들을   벌하겠습니다!”

“주교님.   발언을   철회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지금   제   말을   듣지   않으면   분명   후회하실   겁니다.”

“철회?   당신에게   굴복할   바에야…….”

툭.   가느다란   손가락이   등에   닿는다.

동시에   레비함은   눈앞의   세상이   일변함을   목격하였다.

‘……어?’

어둠.   세상이   갑작스레   칠흑과도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테오라드와   베이넌,   수풀이   우겨진   공간,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나무,   풀을   뜯어   먹고   있던   말들이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당연한   것처럼   어둠이   자리를   잡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   무서우리만치   고요했다.   숨   막히는   침묵이   두려웠던   레비함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식별할   수   있는   사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   섬뜩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   믿음은   너를   지켜주지   못한다.   빛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이니.

흠칫   놀란   레비함이   뒷걸음쳤다.   헛것을   들었나   싶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으나,   목소리는   귀에다   대고   말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   내   너를   가엾이   여겨   자비를   베푸마.   살고   싶다면   이곳을   떠나라.   그리고   저택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영원토록   함구하라.

레비함이   이를   빠득   갈았다.   이건   악마의   속삭임이   분명하다고   판단했기에.

“테오라드   데하름!   네놈이   기어이   악마와도   결탁하여   사술을   부리는구나!   그렇다   하여도   나는   굴복하지   않는다.   내   마음에는   여신이   함께하시기에   네놈의   사특한   술수에   당하지   않음이라!”

손아귀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킨   레비함이   신성한   불꽃을   터트렸다.   황금빛으로   찬연하게   타오르는   불길이   주변의   어둠을   몰아낸다.

“빛의   신께서는   나약한   자를   종으로   삼지   않으실지어니!”

점차   그   크기를   키워가던   불꽃은   어느새   사방을   훤히   비출   정도로   맹렬해졌다.

자신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음에   모종의   희열을   느낀   레비함은,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가   저도   모르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

빛이   모두   밝혀내지   못한   어둠의   저편에서,   수십   개에   달하는   붉은   눈동자들이   이쪽을   가소롭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대하며   오만하다.   눈동자들의   시선은   마치   너   같은   것은   언제든   짓이겨버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   아…….”

항거할   수   없는   자연재해를   만난   사람처럼,   레비함이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손아귀에서   불타던   신성한   불꽃이   아지랑이가   되어   흩어진다.

잠시나마   밝게   빛났던   레비함의   세상은   또   다시   어둠에   잠식되었다.

“사,   살려…….”

겁에   질린   레비함의   눈동자가   공포에   젖어   떨려갔다.

테오라드   데하름.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털썩.   레비함이   돌연   무릎을   꿇자   베이넌이   미간을   찌푸리며   검을   물렸다.

“……왜   저러시는   겁니까?”

“모른다.”

물어본다고   내가   알   리가   있나.

다만   지금   레비함의   상태(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계속해서   무어라   중얼거리는)를   보면   엘프가   무슨   수를   썼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실제로   엘프가   몸을   건든   이후부터   레비함이   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으니   내   예상이   맞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나나   베이넌이나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일이   전무하니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중얼거림을   끝마친   레비함의   눈에   초점이   돌아온다.

그러나   생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두   눈에   독기를   머금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초췌해진   안색이다.

“아아.   돌아왔다.   돌아왔어…….”

한   줄기   눈물을   흘리며,   폐인처럼   혼잣말을   내뱉은   레비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멀건   눈동자를   굴려가며   주변을   살펴보던   레비함은   나를   발견하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오해를   해서   죄,   죄송합니다!   저는   가아,   가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과가   당황스러워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침묵하자   레비함은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더니   뒤돌아   뛰쳐나갔다.

행동거지가   흡사   악령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한   탓에   절로   의문이   생긴다.

그건   베이넌도   마찬가지였다.

“도련님.   의심해서는   안   되는   건데,   주교님   혹시   마약하십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만   그렇잖습니까.”

탁.   베이넌이   검을   갈무리하여   검집에   집어넣었다.

“싸우자고   해놓고서는   갑자기   당황하면서   주변을   휙휙   둘러보시더니   손아귀에   불길을   일으키고,   그   다음에는   무릎   꿇고   애원하듯   중얼거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고는   사죄하고   도망가는   게…….   이거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닙니다.”

“네   말대로   정상은   아니지.”

엘프한테   시달렸을   텐데   정상적인   반응이   나올   수가   없잖은가.

“그래도   주교님을   의심하는   것은   좋지   않다.   베이넌   너는   주교님을   따라가서   숲을   빠져나가는   걸   도와드려라.   숲길은   위험하니.”

“예?   아까는   포박하시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하지만   오해가   풀리셨다고   하니   쓸데없는   마찰을   일으켜서는   안   되겠지.”

“뭐…….   그럼   저는   주교님을   호위하러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멋쩍게   있던   베이넌이   뒤편으로   걸어가   말에   올라탄다.

“이랴!”

말의   옆구리를   걷어찬   베이넌이   능숙한   승마술로   숲을   가로지르며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엘프가   레비함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덕분에   레비함은   엘프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내게   오해가   풀렸다고   사죄를   한   것도   그   이유일   것이고.   그러니   굳이   레비함을   저택에   붙잡아   둘   필요는   없었다.

‘역시.   앞으로   조금만   더   버티면   기사단이   파견을   오겠어.’

후후.   멍청한   엘프   같으니라고.

주교님께서   네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을   아셨을   테니   네가   토벌당하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다.

그러니   지금의   평화를   마음껏   만끽하도록   해라.   기사단이   저택에   파견을   오는   날이   곧   네   마지막이   될   테니까.

“주인닝…….”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프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로   다가와   안겼다.

내   몸에   비벼지는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이   꽤나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주인님이라면   저를   구하러   와주실   줄   알았어여…….”

“버러지가.   나는   네   년을   걱정한   게   아니라   주교님을   걱정한   것이다.”

“히잉.   말은   그렇게   하시지만   제   걱정도   하셨다는   걸   알아여…….”

미안하지만   네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진심이다.

*

이튿날.

주교님을   돌려보낸   이후,   어째서인지   엘프의   태도가   많이   유순해졌기에   나는   저택   내에서   엘프의   눈치를   보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하여   나는   오랜만에   가문에서   운영하고   있는   노예   작업장   중   하나……   일명   향신료   농장에   도착하였다.

‘잘   자라고   있구나.’

적당히   넓은   평지에   줄지어   심어진   후추나무가   탐스럽기   그지없다.

아버지   대부터   품종   개량을   거듭한   결과,   대륙의   남부에   위치한   이겔라   왕국에서만   재배가   가능하다던   후추나무를   이제   제국의   중부에서도   무리   없이   키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올해부터   본격적인   수확에   나설   것이니   기대하는   바가   크다.   단순히   수익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만은   아니었다.

여태   제국은   후추를   아겔라   왕국에서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비쌌다.

국경을   넘어오면서   운송비는   물론이고   관세까지   더해지며,   국내로   들어온   후추를   중계업자들이   매점하였기에   후추는   자연스레   귀족들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다.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니   평민들은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   우리   가문에서   후추   농사에   성공하여   시장가보다   훨씬   저렴하게   판매한다면   평민들도   이제   향신료를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백작령은   지금보다   더   풍요로워지겠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농장의   외곽에서   말을   몰고   있으니,   저편에서   깔끔한   튜닉을   차려입은   사내가   달려왔다.

누군가   싶어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자   작업장의   노예인   헤디안이었다.   구릿빛   피부가   인상적인   청년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가주님!   이리   행차하실   거면   미리   말씀해   주시지   그랬습니까.”

“자네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네.   산책   겸   나온   거라.”

“그래도요.   아!   일전에   베풀어주신   값비싼   고기와   술에   대해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양이   어찌나   많은지   창고에   쌓아둘   정도입니다.”

“적을   줄   알았는데   두고두고   먹을   수   있다니   다행이구나.   다른   필요한   게   있다면   시종장을   통해   언제든지   말하게.   최대한   편의를   봐줄   테니.”

“아닙니다.   지금도   복에   겨운데   뭘   더   바라겠습니까.   아참.   저희가   가주님께   전해주려고   했던   게   있었는데   마침   잘   되었습니다.”

나한테?   의아함에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헤디안이   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들었다.

꽤나   고풍스러운   외양이다.

“이게   뭔가?”

“저희가   봉급을   십시일반하여   귀중품   가게에서   산   팔찌입니다.   가주님의   품격에   맞게끔   최대한   고급스러운   걸로   샀습니다.”

“아니.   자네들   봉급이   얼마나   된다고…….”

“다른   귀족들은   노예한테   봉급을   주지도   않는데요,   뭘.   그리고   가주님께서   저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닙니다.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상자를   건네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동이   밀려오는   터라   괜히   눈시울이   붉어진다.

나는   이들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이들은   내게   감사함을   느끼며   없는   봉급을   쪼개어   선물을   해준   것이   아닌가.

이리도   착한   이들이   내   노예가   된   것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나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상자를   품에   넣었다.

“고맙네.   자네들이   사준   귀중품은   내   평생   잊지   않으며   간직하겠네.   하늘이   두   쪽   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야.”

“말씀만이라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앞으로도…….”

“가주님!   가주니임─!”

다급한   외침에   헤디안의   말이   끊긴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저택의   사용인인   말타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터덜터덜   다가왔다.

“헤엑,   헥…….   아이고오…….   농장에   가셨으면   미리   말씀을   주시지   그랬습니까.   정말이지   한참을   찾았습니다.”

“나를?   저택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딱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니옵고,   에실리   영애께서   저택에   찾아오셔서   말씀을   전해드리려   온   겁니다.”

“에실리가?”

다소   뜬금없기는   했지만   얼굴을   못   본지   꽤   되었으니   저택을   찾아올   법도   하였다.

오히려   좋지   않은가.   에실리를   보는   것은   내   삶의   즐거움   중   하나였기에   당장   말고삐를   돌렸다.

“지금   바로   가야…….”

어.   잠깐만.

저택에   에실리가   왔으면   분명   엘프가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엘프에게   약혼반지를   치장   반지라고   거짓말을   한   전적이   있었다.

만약   엘프가   에실리의   약지에   끼인   약혼반지를   보는   순간,   내   거짓말이   들통   나고   만다.

“망할!”

이렇게   된   이상   한시라도   빨리   저택에   도착해야   한다!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한   내가   말고삐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히이잉!   투레질과   함께   노면을   박찬   말이   저택을   향해   쾌속으로   질주하였다.

*

데하름   저택,   응접실.

고급스러운   테이블   앞에   앉은   에실리는   반대편에   자리한   엘프를   여상하게   바라보았다.

귀족가의   영애와   대면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는   듯   우물쭈물하고   있었지만,   에실리는   저게   연기인   걸   알고   있었다.

더구나   저택에   도착했을   때,   엘프가   무의식적으로   이쪽의   왼손   약지를   흘겨보던   것을   생각하면   테오라드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도   알만하였다.

‘반지를   빼고   마차에서   내린   게   다행이었어.’

혹시나   싶어서   반지를   손가방에   넣고   내리지   않았다면   테오라드가   끔찍한   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안도의   숨을   내쉰   에실리가   밝은   표정을   연기하며   말문을   열었다.

“괜찮으니   드세요.   제가   겸상을   부탁드린   거니까   사용인들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어요.”

“하,   하지만…….   주인님이   싫어하실   게   분명해서어…….”

“테오라드   경이요?   설마요.   이런   사소한   문제쯤은   넘어가주실   거예요.”

“아니에요.   영애님은   주인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세요.   주인님께서는   접시를   깨트렸다고   저를   범하시려고   하셨거든요…….”

지금   누가   누구보고   테오라드에   대해서   알지   못할   거라고   하는   거지?

속에서   화가   차오르는   걸   느꼈지만,   에실리는   평정을   유지하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정말인가요?   테오라드   경이   접시를   깨트렸다고   당신을   범하려고   했다고요?”

“네에…….   그게,   제가   예쁘게   태어난   것이   잘못이라면서   막……   가슴을   주무르시고…….”

“그런가요.   테오라드   경은   참으로   나쁜   사람이네요.”

찻잔을   든   에실리가   홍차를   살며시   홀짝인   후   내려놓았다.

“타인을   자기   멋대로   ‘속박’하고   ‘강요’하는   건   인성에   문제가   있는   건데   말이에요.”

울먹거리던   엘프의   표정이   멎는다.   분명   테오라드를   비난하는   논조일   텐데,   어딘가   모르게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침묵하던   엘프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저는   주인님이   이해되어요.   눈앞에   수려한   외모의   여자가   있으면   손을   한   번   대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니까요.”

“아니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전혀   이해가   되질   않네요.   외양보다   중요한   건   속에   든   내용물이잖아요?   비슷한   속담을   예로   들자면…….”

으음.   턱에   검지를   올린   에실리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금잔에   담긴   독극물을   마실   바에야   은잔에   담긴   물을   마시겠다는   말이   있어요.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헤에…….   영애께서는   참으로   현명하세요.”

엘프의   낯에   그늘이   진다.

책을   잡고   싶은데,   교묘하게   의심을   피해가는   에실리   덕분에   엘프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그건   에실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테오라드를   제멋대로   가지고   놀려는   엘프에게   혐오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건방진   단명종   주제에…….’

‘착각하지   마.   테오라드는   네   것이   아니야.’

그러나   서로는   진심을   터놓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에,   홍차를   홀짝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잔혹하리만치   무거운   침묵이   이어진다.

멀찍한   곳에서   지켜보는   사용인들의   눈에는   엘프와   에실리가   느긋함   속에서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나,   실상은   서로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영애님은…….”

살얼음판과   같은   침묵을   깨트린   것은   엘프였다.

엘프는   에실리에   대한   적의를   완벽하게   숨겨내며   순진한   눈방울을   깜빡였다.

“주인님과   몸을   섞은   적이   있으신가요?”

“……네?”

당황.   에실리의   태연함에   균열이   일어난   것을   확인한   엘프가   미묘하게   입   꼬리를   올렸다.

“영애님은   옛날부터   주인님과   아는   사이시고   약혼까지   하셨다고   들어서요.   무례한   질문이라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해요…….”

에실리는   숨을   고르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엘프의   말이   도가   넘었다고   생각한   사용인이   이쪽으로   다가와서   상황을   중재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러나   노예인   엘프와   겸상을   하고   싶다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닌   에실리   본인이다.

황제   폐하조차   어쩌지   못하는   레오베르크   백작의   딸이자,   제국의   중부를   다스리는   펠가로인   백작가의   영애가   직접   부탁한   일.

함부로   입   밖에   꺼낼   수조차   없는   거대한   가문의   위상을   등에   지고   있는   영애의   티타임을   방해할   정도로   강심장인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자충수야…….’

에실리   쪽에서   엘프에게   겸상을   하자고   제안한   이상,   상대가   정도   이상으로   무례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외부에서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엘프는   그   점을   이용하여   은근슬쩍   공격을   가해오고   있는   것이다.

당했다.   허점을   이런   식으로   파고들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낮게   침음을   흘린   에실리는   찻잔을   들어   홍차를   홀짝이는   것으로   시간을   벌었다.

‘어떻게   해야…….’

몸을   섞었다고   거짓말을   칠까?

‘그래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자존심.   테오라드는   네   것이   아닌   내   남자라고   말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얼마가지   않아   들통   날   거짓말이다.   테오라드의   곁에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많은   엘프는   언젠가   지금의   거짓말을   간파할   것이다.

거짓말을   간파당한   이후에   엘프에게   당할   모멸을   감수하느니   솔직해지는   편이   나았다.

탁.   찻잔을   내려놓은   에실리가   당당하게   말했다.

“안타깝게도,   몸을   섞은   적은   없어요.”

“그런가요?   오래   알고   지내셨으면서   왜   관계를   가지시지   않은   걸까요…….”

혹시   말이에요.   엘프가   턱을   치켜들며   입매를   비틀었다.

“두   분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신   게   아닐까요?”

벽면에   붙어   대기하고   있는   사용인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가,   마음에   상처를   입히며   귓전에   파고든다.

찻잔을   쥐고   있는   에실리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손끝이   노랗게   물들   정도였다.

“지금   뭐라고…….”

“그렇잖아요.   사랑하는   사이라면   몸을   섞는   게   당연하잖아요.   인간   분들은   다들   그러는   것   같던데요…….   심지어   주인님은   저   같은   노예의   알몸도   만지시는데,   약혼녀이신   영애님의   알몸조차   보지   않는   건   문제가   있겠다   싶어서요.”

“그건   어쩔   수   없이……!”

에실리는   말하다   말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흥분해버린   탓에   엘프의   유도   심문에   그대로   걸려들고   말았으니까.

“그렇구나.”

엘프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비죽거렸다.

“영애님과   주인님은   몸을   섞기는커녕   서로의   알몸조차   본   적이   없는   거군요.   정말로   지고지순한   사랑이세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에요.”

네가   사랑이라고   여긴   것은   실은   사랑이   아닌   허상이다.   혹여   네가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라도   테오라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엘프는   에실리를   좌절시키기   위해   비난의   논조를   계속해서   퍼부어대고   있었다.

엘프의   파상공세에   한순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나   에실리는   테오라드를   향한   믿음을,   테오라드가   자신에게   보여준   믿음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몸을   섞는다고   하여   그게   진정한   사랑일까요?”

거칠어진   호흡이   평이해진다.

“스스로가   말하고도   웃기지   않으신가요.   단지   몸을   섞는   것으로   사랑이   완성된다면   창관의   매춘부는   대체   몇   명의   사내와   사랑을   나누는   걸까요?”

떨리던   말소리가   명경지수와   같이   차분해졌다.

“정욕은   단지   정욕일   뿐   사랑이   아니에요.   본디   사랑이란   본능으로   완성되는   게   아닌,   이성으로   완성되는   거랍니다.”

“하지만…….”

“그래요.   몸을   섞는   그   순간만큼은,   서로의   알몸을   보고   흥분하며   살을   맞대는   시간만큼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느낄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착각이   아닐는지요.”

엘프의   낯이   싸늘하게   식는다.

에실리는   시선을   조금   내려,   이제는   다   식어버린   홍차를   바라보았다.

“매춘부들은   하루에도   몇   명의   사내에게   사랑을   고백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절정의   순간이   오면   사람의   이성은   반쯤   마비가   되니까   말이에요.   그럼   하나만   물어볼게요.”

고개를   든   에실리가   엘프를   마주보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불티가   튄다.

“당신은   매춘부와의   사랑을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완곡하게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말하는   요지는   ‘너는   테오라드가   이용하는   매춘부’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에실리   영애님.”

이제는   재미가   없는   것을   넘어서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죽일   수   있는   연약한   단명종   주제에   조금도   지려고   하지   않는   것이   못내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죽일   수   없다.   테오라드의   약혼녀를   죽이는   순간   지금의   이   생활도   끝나고   말   테니까.

테오라드가   과거에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못한   지금에서는   별   방도가   없었다.

“말씀을   참   잘하세요.   놀라울   정도로요.”

그래서   마냥   웃었다.   끓어오르는   화를   숨기고   가면을   쓰는   것   정도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시간은   어차피   내   편이야.’

언젠가   테오라드를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함락시킬   것이다.

그   어떠한   ‘강요’도   ‘속박’도   존재하지   않음에도   테오라드가   이쪽을   사랑하게   된다면   너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것이   참으로   궁금하였다.

“엘프님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친한   친구가   될   수   있겠어요.”

에실리   또한   엘프를   마주보며   고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네   편이라   생각하고   있겠지.’

미안하지만   틀렸다.   언제까지고   무념하게   당해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언젠가   너에   대한   모든   걸   파악하게   된다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너를   저택에서   내쫓고   테오라드를   되찾을   것이다.

‘그러니.’

‘그러니까.’

둘의   눈빛에   표독스러움이   담긴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오만하게   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역설적으로,   서로는   마음속에   같은   뜻을   품으며   느긋한   티타임을   만끽하였다.

*

저택에   도착한   나는   말에서   내려   정신없이   달렸다.

중간에   마주친   사용인들이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았지만   체통을   지킬   시간   따위는   없었다.

‘에실리가   위험하다……!’

약혼반지를   끼고   있는   걸   엘프한테   들켰다면   지금쯤   몹쓸   짓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달리고   또   달려서   응접실에   도착한   내가   문을   벌컥   열었다.

“에실리……!”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응접실의   풍경은   무척이나   고요하였다.

테이블   앞에서   다과를   먹고   있는   엘프와   에실리의   모습은   무척이나   정적이었음으로.

‘……별   일   없었나?’

거칠어진   숨을   연거푸   토해낸   나는   땀에   젖은   앞머리를   뒤편으로   쓸어내리며   안으로   걸어갔다.

그때까지도   엘프와   에실리는   이쪽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게   의아했던   내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말문을   열었다.

“에실리.   오늘은   어쩐   일로…….”

그제야   에실리가   이쪽을   돌아본다.   가지런히   내려앉은   금발과   청초한   벽안은   여전히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보기만   해도   행복해진다는   기분이   이런   걸까.

내가   흐뭇함   속에서   말을   이으려는   찰나,   에실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테오라드   경.”

왜인지   모를,   표표한   기운이   사방에   뿜어진다.

“할   말이   있으니   사용인들을   모두   물려주세요.”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할   말이   있다고   말했을   텐데요.”

태도가   상당히   사나운   탓에   괜히   기가   죽는다.

에실리의   청을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었기에   내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시중을   들   필요는   없으니   모두   물러가라.”

사용인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우물쭈물   거렸으나,   에실리가   한차례   쏘아보자   겁에   질린   사람마냥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응접실을   모두   나가버렸다.

잠시   후   텅   비어버린   응접실에서,   에실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마주보았다.

“엘프에게   들었어요.   고작   접시를   깨트린   것   때문에   성고문을   했다지요.   당신은   여전히   귀축처럼   살고   있군요.”

아프다.   에실리의   입에서   나온   비난이   내   마음을   아프게   후벼파고   있었다.

그러나   저게   어쩔   수   없는   연기라는   걸   아는   이상   맞춰주지   못할   건   없었다.

“그렇다면?”

에실리가   내게로   가까이   다가와서   멈춰   선다.

덕분에   엘프는   에실리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테오라드   경!   저런   천박한   노예를   범하려고   했던   것이   부끄럽지도   않으신가요?   차라리   길거리의   부랑자를   범하지   그러세요!”

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고   있자,   에실리가   조용히   입을   뻐끔거렸다.

제   뺨   을   때   려   요

뺨을   때리라고?   의도를   알   수   없어서   머뭇거리자   에실리가   다시금   외쳤다.

“저런   버릇없고   염치없는   노예가   어디가   좋다고   끼고   사는   건가요?   말해보세요!”

아직도   의도를   모르겠지만   에실리가   악역을   연기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에실리의   몸에   손을   대는   싶지는   않지만,   호응을   해주지   않아   에실리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   순   없었다.

내가   마음을   굳게   먹고   손을   휘둘렀다.

짝!

뺨을   맞은   에실리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괘,   괜찮은   건가?   세게   때린   건   아니었지만   혹시나   싶어서   식은땀이   흐른다.

에실리는   그런   나를   올려다보며   세상   서럽다는   것처럼   울먹거렸다.

“테오라드   경……!   겨우   노예를   욕했다고   제게   폭력을   행하시는   건가요?   이건,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에실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펠가로인의   기사   두   명이   묵직한   발걸음을   옮기며   다가왔다.

“테오라드   경.   저는   당신을   재판소에   데려가   처벌을   의뢰하겠어요!”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내   의문은   필요하지   않다는   듯   펠가로인의   기사가   내   양옆을   포위하였다.

가문의   당주에게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규칙   때문에   호위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야트막한   깨달음에   헛숨을   들이켰다.

‘엘프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엘프는   우리   둘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하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예전에   에실리가   저택에   찾아왔을   때는   물론이고   무도회   때도   싸우는   모습만을   보여줬으니까.

그러니   지금   싸우는   모습을   한   번   더   보여주는   것으로   엘프의   의심을   완전히   지울   속셈이었다.

더해   사용인들을   모두   물리라   한   것은   헛된   소문이   돌아   내   명예가   실추되지   않기를   원해서였을   것이고,   이   기사들과도   미리   말을   맞춰놓았을   것이   분명하다.

에실리가   들어오라   말하지도   않았는데   짜   맞춘   것처럼   등장한   걸   보면   거의   확실하였다.

‘재판소에   데려가겠다고   한   건…….’

마차를   타고   저택을   벗어나기   위한   구실이다.   일반적으로   재판소에   노예를   데려갈   순   없음으로,   엘프가   따라붙는   불상사도   사전에   차단한   셈이다.

과연.   에실리는   처음부터   나를   저택에서   빼내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이곳에   온   것이다.

미리   연락을   주지   않고   불시에   찾아온   것도,   엘프가   눈치를   채고   대비를   할까봐   걱정해서였을   터였다.

“하…….”

상황을   파악한   내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에실리를   내려다보았다.

엘프를   등지고   주저앉은   에실리가,   천천히   손을   들어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대었다.

쉬잇.

왼손.   그   요망한   손짓에는   약혼반지가   끼여져있지   않았다.

덕분에   벅차오르는   감정을   차마   숨길   수가   없었다.   나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지금의   연기를   어설프게나마   이어갔다.

“너는   참으로   간사한   년이로구나.”

에실리   또한…….

“간사해야   살아남는   세상이니까요.”

조금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나는   에실리의   인도에   따라   저택의   앞뜰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로   향했다.

펠가로인의   기사   두   명이   내   양옆에   따라붙었으나,   호위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기에   나와   에실리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용인은   없었다.

단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졸졸   따라오는   엘프만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타요.”

마차의   열린   문을   향해   에실리가   턱짓한다.

고매한   표정에   걸린   불만   한   줌이   대단하다.   여태   엘프에게   시달리며   나름   연기에   이골이   났다고   생각하는   나조차도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였으니.

“그러지.”

내가   마차의   안쪽에   들어가서   앉자,   에실리가   뒤늦게   들어와서   옆에   앉는다.   에실리의   호위를   맡은   기사들은   각자의   말에   올라타   출발할   채비를   하였다.

“편히   모시겠습니다.”

실없게   웃은   마부가   문을   닫은   이후.   나는   창문을   통해   엘프의   낯빛을   살폈다.

메이드   정복을   입은   채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있었지만,   그늘진   얼굴에   드러난   분노가   무섭게   느껴진다.

왜인지   시선이   내가   아닌   에실리에게   향하고   있는   것   같은데…….

“출발하겠습니다!”

마부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말들이   투레질을   하곤   내달린다.

엘프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저택과의   거리가   멀어지자   에실리가   긴장을   풀고   늘어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으…….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내가   에실리를   다독였다.

“고생했다.   너는   이리도   노력했는데   내가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테오라드   경.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저는   그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니까요.”

“아…….   그래.   이해한다.   내가   데하름   가문을   대표하여   보답을   해주마.   원하는   물건이나   귀중품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거라.”

“땡.   이번에도   틀렸어요.”

에실리가   양   팔을   교차시키며   볼을   부풀린다.   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과장된   행동을   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네   스스로가   더   떨고   있으면   어쩌란   말이냐.’

에실리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250살을   먹은   엘프를   앞두고   이야기를   나눴던   여파가   아직까지도   잔재한   것이다.

이리도   떨고   있었으면서,   엘프   앞에서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연기를   이어가던   에실리가   대견하며   미안하였다.

나는   손을   들어   에실리의   뺨을   때렸던   곳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예쁜   얼굴이다.   고운   얼굴이고.”

“읏,   테오라드   경……?”

“네게   행한   폭력이   비록   연기에   불과하다   하여도,   내가   네게   몹쓸   짓을   하였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라.   네게   빚을   지고   싶지는   않으니.”

에실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양   볼이   미약하게   붉어진다.

“그,   그러니까   저는……   원하는   게,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던   에실리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손을   들어   내   손등을   가볍게   붙잡았다.

에실리의   포근한   체온이   내   손의   앞뒤를   가로막는다.

“그냥…….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줘요.”

“이해가   안   되는군.   겨우   이런   걸로   만족할   수   있겠나.”

“겨우가   아니에요.”

내   손에   뺨을   기댄   에실리가   배시시   웃어보였다.

“제게는   전부에요.”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되묻지는   않았다.

행복해하는   에실리를   보고   있으면   나   또한   행복함으로,   에실리의   바람대로   잠시만   이렇게   있어주기로   마음먹었다.

덜컹─!

오랜만에   찾아온   평온을   즐기는   사이   마차가   재판소에   도착하였다.

손을   거두고   잠시   기다리자   마부가   문을   열어주었다.

“도착하였습니다.   따로   짐이   있으시면   들어드릴까요?”

“짐은   없으니   괜찮아요.   대신   이   근처에서   기다려주시겠어요?”

“예,   아가씨.   얼마든지요.”

“고마워요.   그럼   테오라드   경,   절   따라오세요.”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재판소에   들어갈   셈인가?”

“그럼요.   제가   재판소에서   볼   일이   있다고   말해두지   않았던가요?”

아.   그렇군.

에실리는   지금   마부조차   속이고   있는   것이리라.

고개를   끄덕인   나는   에실리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펠가로인의   기사들은   재판소에   들어오지   않고   입구를   지켰으며,   나는   에실리를   따라서   계단을   올라   재판소에   입장하였다.

깔끔한   홀에   대리석   기둥이   인상적이다.   사람은   많으나   소음이   전무한   공간이   묘하게   마음에   안정을   전해주고   있었다.

“아가씨!   테오라드   가주님!”

법조인이   바쁘게   오가는   공간에서,   말끔한   차림의   사용인   두   명이   밝게   인사하며   걸어온다.   각자의   손에는   깔끔한   옷이   들려있었다.

뭔가   싶어서   쳐다보니   내   쪽으로   다가온   사용인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테오라드   가주님.   저는   아가씨의   시종인   노먼이라   합니다.”

“만나서   반갑네.   그런데   그   옷은…….”

“갈아입으시라고   준비했어요.”

에실리의   말이었다.   돌아보자   꽤나   진중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주의해서   나쁠   건   없겠죠.”

“그렇군.   네   말이   맞다.”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럼   갈아입은   후에   뒷문에서   만나요.   길은   노먼이   알려줄   거예요.”

에실리.   너는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이   참으로   많구나.

나는   네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였는데.

조금은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갈아입으마.”

*

옷을   다   갈아입은   나는   노먼의   안내에   따라   재판소의   뒷문에   도착하였다.

조금   불편한   게   있다면   노먼이   갈아입으라고   건네준   옷이   어색하다는   것이다.

세련된   외양을   보아하니   공국에서   유행한다던   정장이라는   것일   텐데,   항상   가문의   옷을   입던   내게   있어서는   조금   이질감이   들었다.

“가주님.”

속삭이는   어투에   시선을   돌리자,   노먼이   슬그머니   웃어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충분히   멋있으십니다.   남자인   제가   봐도   잘생기셨어요.”

“잘생겼다니.   아첨하지   않아도   되니   빈   말은   하지   말거라.”

“예?   진심입니다.   어디   가서   잘생겼다는   말   들어본   적   없으십니까?”

“있기야   하다만은   그게   진심일   리   없지   않은가.   사교계에서   주고받는   말에   진실이   얼마나   있다고.   더구나   작고하신   아버지는   물론이고   시종장도   나를   보며   평범한   얼굴이라   말하곤   하였다.”

“어…….   테오라드   가주님?   혹시   제게   농담을   하시는   것인지……?”

우물쭈물하는   연기가   일품이다.   거짓말을   능숙하게   하는   것에   모자라   표정   연기까지   능수능란하니   사회생활을   아주   잘할   것   같았다.

그래도   지나친   아부는   자칫   독이   될   수   있었다.

“테오라드   경!”

노먼에게   한   마디   해주려는   찰나,   반대편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오기에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저도   모르게   놀라고   말았다.   무릎이   드러난   짧은   치마에   하늘거리는   윗옷을   입은   에실리의   모습이   나보다도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윗옷   위에   가는   외투를   걸쳤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어디   눈을   둘   대가   없었을   정도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에실리가   여태   숨겨둔   각선미가   자꾸만   내   시선을   빼앗아가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어때요.   괜찮은가요?”

가까이   다가온   에실리의   말에,   내가   시선을   거두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관능적이나   위태롭구나.   남에게   보여주기   싫을   정도다.”

“그   정도인가요……?   혹시   불편하시면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올게요.   여벌로   가져온   옷이   좀   있거든요.”

갈아입을   정도의   복장은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이들의   의견은   어떤가   싶어   슬쩍   살펴보자,   노먼은   물론이고   에실리의   여시종까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빠르게   의견을   수렴한   내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불편하다고   하여   네   아름다움을   빼앗기는   싫구나.   갈아입지   않아도   된다.”

“테오라드   경…….”

짐짓   감동한   에실리의   뒤편에서   여시종이   엄지를   척   치켜든다.   잘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여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고마운   녀석들이다.

“아참.   나가기   전에   착용할   게   있어요.”

“착용할   거라니?”

에실리의   뒤편에   있던   여시종이   걸어나온다.

손에   들고   있는   방석   위에는   짐승의   귀를   본   딴   머리띠   두   개가   놓여있었다.

“이게   대체…….”

“인식   저해   마법이   걸려있는   물건이에요.   원래   장신구   쪽으로   구하려고   했는데,   급하게   구하려니   매물이   몇   개   없어서…….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다.   그런데   인식   저해   마법이   걸려있다고   해서,   그…….”

얼버무림의   뜻을   알아챈   에실리가   사용인들에게   눈치를   주었다.   노먼과   여시종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뒤편으로   사라진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보는   것으로   엿듣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내가   에실리의   귀에   대고   살며시   속삭였다.

“엘프에게   안   걸린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테오라드   경의   말이   맞아요.   그래도   확률은   많이   낮춰   줄   거예요.   기본적으로   인식   저해   마법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인식   저해에   걸려있다는   걸   인지해야   하는데,   복장을   바꿔   입었으니   엘프는   저희의   정체를   눈치   채기   힘들   거예요.”

하나   더.   에실리는   말하며   머리띠를   착용하였다.   에실리의   머리색과   같은   금빛의   귀가   착용자를   인식하며   가볍게   쫑긋거린다.   자세히   보니   고양이   귀를   닮았다.

“정문으로   들어와   후문으로   나가는   것이기에   엘프는   저희가   재판소   안에   있다고   착각할   거예요.   마차는   물론이고   호위   역할을   맡은   기사들까지   대놓고   보여주고   있으니   더더욱.   엘프가   노예   역할을   그만두고   재판소   안에서   난동을   부릴   게   아니라면   입구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과연…….”

일리가   있었다.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니   에실리가   양   손으로   머리띠를   내민다.   내   머리색과   맞춘   것인지   이건   검은색이었다.

“자.   이제   테오라드   경   차례에요.”

눈을   빛내는   것을   보니   어쩐지   기대하는   낯빛이었다.

장신구   매물이   없어서   고양이   머리띠를   샀다는   건   아무래도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나는   묘한   의심을   지우지   못한   채   머리띠를   머리에   착용하였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부끄러워서   헛기침이   나온다.

“어떤가.”

“푸흐.”

웃음이   대답으로   돌아왔다.

입을   가리고   작게   키득거린   에실리가   눈가를   닦아낸다.

“죄송해요.   테오라드   경이랑   그   머리띠가   생각보다   안   어울리는   거   같아서.   뭐라고   해야   할까,   귀여운   느낌이에요.”

원해서   착용한   것도   아닌데   대뜸   귀엽다며   웃어버리니   묘하게   기분이   상한다.

미간을   찌푸린   내가   시큰둥하게   에실리를   바라보았다.

“귀엽다고.   데하름   가문의   당주인   내가.”

잔잔하게   퍼져가던   에실리의   웃음이   멎는다.

잠시   멍하니   있던   에실리는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돌렸다.

홍조가   든   얼굴에서   다소   달뜬   호흡이   흘러나온다.

“지금   보니   멋있는   거   같기도   해요…….”

적잖이   떨리는   목소리가   수줍음을   담고   있었다.

에실리가   가끔씩   보여주는   이런   모습은   혼자   보고   있기   아까울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에실리.   이제   보니   귀여운   건   너이지   않은가.”

“아,   음…….”

에실리의   얼굴이   전보다   더욱   붉어진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바늘로   콕   찌르면   터질   것만   같았다.

고장   난   기계처럼   가만히   있는   모습이   우스웠다.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에실리와   단   둘이서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날리고   싶지는   않았다.

“가도록   하지.   엘프에   관해서   할   말이   있으니   나와   저택   밖까지   나온   것이   아닌가.”

“마,   맞아요.   제가   알아낸   사실에   의하면…….”

조금은   나중에.   벌써부터   엘프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다.

내가   에실리의   손을   가볍게   붙잡으며   맑게   웃었다.

“엘프   이야기는   뒤로   미루도록   하지.   지금은   에실리   너와   함께   거리를   걷고   싶구나.”

왜인지   에실리는   말이   없었다.

다만   내가   이끄는   대로   떨리는   발걸음을   차근차근   옮길   뿐이었다.

에실리를   데리고   거리로   나온   테오라드는   해맑은   얼굴로   여러   이야기들을   재잘거렸다.

에실리는   그런   잡다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   즐겁다가도,   테오라드의   눈   밑에   내려앉은   거무죽죽한   피로감을   보면   절로   애석함이   들었다.

테오라드가   엘프를   만나기   전에는   건강하고   훤칠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어딘가   모르게   병약해   보이는   용모였으니까.

그래서인지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다.

“최근에   농장에   가봤는데   후추나무의   품종   개량이   완벽하게   성공한   것   같더구나.   이대로라면   제국에서도   후추를   생산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재배에   성공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펠가로인   가문에   선물을   보내마.   아버님도   분명   좋아하실   거다.”

이렇게   밝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는   눈   아랫부분의   거무스름함이   안쓰럽게   느껴져서   어울리지   않는데,   테오라드가   정색하며   차갑게   말을   내뱉을   때에는   어울려도   너무   잘   어울렸다.

─   귀엽다고.   데하름   가문의   당주인   내가.

그때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머리에   끼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고양이   귀는   신경도   쓰이지   않을   정도로   좋았으니까.

“아.   일전에   베이넌과   함께   방문했던   가게가   여기   있었구나.   시장하다면   여기서   한   끼를   해결하는   게   어떻겠는가?   음식을   상당히   잘하는   곳이다.”

어렸을   때부터   테오라드와   만남을   가져왔기에   모르는   부분이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이   남자는   정말이지   다방면으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작   본인은   스스로의   매력이   무엇인지   가늠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조차   자못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엘프가   테오라드에게   집착하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될   만큼…….

“에실리?”

테오라드의   되물음에   상념이   깨어진다.   퍼뜩   정신을   차린   에실리가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네?”

“가게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아아.   식사요?   그렇네요!   들어갈까요?”

반응이   다소   급박했지만   테오라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지.”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펼쳐졌다.

가문의   식당에   비해서는   좁았으나,   오히려   좁았기에   느낄   수   있는   아기자기함이   있었다.

“와아.   멋있는   곳이네요.”

“맛있는   곳이기도   하지.”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짧게   웃었다.

이후   종업원이   다가와서   테이블을   안내해주었고,   두   사람은   창가에   앉아서   식사를   주문하였다.

“네에.   주문   받았습니다.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종업원의   평이한   태도에   테오라드가   신기하다는   듯   머리띠를   매만졌다.

“이게   대단하기는   하구나.”

일전에   베이넌과   함께   방문했을   때는   기가   눌려   덜덜   떨던   종업원이   지금은   아주   평온한   어투로   주문을   받고   사라지다니.

펠가로인   백작가의   영애와   데하름   가문의   당주가   왔으니   이전보다   더   긴장하는   것이   당연할   것인데,   인식   저해   마법이   제대로   발동되고   있는   것인지   종업원은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였다.

“누가   구한   물건인데요.”

에실리가   엣헴,   하며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덕분에   테오라드는   의도적으로   시선을   올렸다.   에실리의   탐스러운   가슴이   도드라지게   보여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무려   명문   마도가에서   정품   인증을   받은   물건이에요.   범용성이   높고   인기가   많아서   밀회를   가질   때에   자주   쓴다고   해요.”

“밀회라.   틀린   말은   아니군.”

테오라드의   입가에   조금은   씁쓸한   미소가   번져나간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에실리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엘프에   관련해서   전해드릴   이야기가   있어요.   제   나름대로   사람을   부려   조사를   해보았는데,   생각보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흥미로운   사실?”

“네.   일단   현재까지   ‘붉은   눈의   엘프’에   관한   정보는   단   한   건도   찾을   수   없었어요.   적어도   마탑의   도서관에는   기록되지   않은   게   분명해요.”

저게   무슨   소리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붉은   눈의   엘프라면   바로   저택에   있지   않은가.

오랜   세월을   살았으니   필연적으로   누군가에   의해   관측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기록으로   남아   있을   것이   당연한   것인데.

난관에   봉착한   사람처럼   테오라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더해   등허리에   오한이   서렸다.

“혹시…….   내가   엘프라고   생각한   것이   실은   엘프가   아니라던지……?”

“아니요.   종족이   엘프는   맞는   것   같아요.   기록에만   없다   뿐이지   구전으로   내려오는   정보는   있거든요.   노예   사냥꾼들   사이에서   도는   속담   같은   건데,   ‘붉은   눈의   엘프를   만나면   삼대가   멸할   것이다’는   소리가   있다고   해요.”

“기록에는   없는데   구전으로는   전해   내려온다?   그게   가능한   것인가?”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아요.”

정보를   취합한   에실리가   진중하게   말했다.

“엘프는   아마   세상을   돌아다닐   때에는   모습을   바꾸고   다녔을   거예요.   만약   정체를   들켜   기록에   남는다   하여도   본인이   모두   없애버렸을   가능성이   있어요.   아니면   엘프와   관련된   모종의   단체가   암약하여   기록을   모두   없애고   다닌다던가.”

“아무리   그래도   붉은   눈의   엘프가   역사서에   한   번도   기록된   적이   없다는   건-”

“극소수의   특권   계층.”

테오라드의   말을   끊은   에실리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혹은   돌연변이라고   보는   편이   맞아요.   붉은   눈의   엘프가   세상에   흔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기록이   남아있을   테니까요.   그게   아니라면   모든   기록을   말소시키는   기예를   부리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요.”

테오라드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생각보다   더한   거물에게   목숨을   붙잡히고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럼   엘프가   노예로   잡혀온   게   처음부터   계획성이란   말인가?”

“맞아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잡혀온   게   아니고   잡혀온   척을   한   거죠.   테오라드   경에게   팔리기   위해서.   노예   상인도   엘프에게   협박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고요.”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이상했다.   노예   상인   녀석,   엘프   노예를   팔자마자   다른   모든   노예를   급하게   처분하고   공국으로   도망가다니.   마치   겁에   질린   사람의   행동   양식이지   않은가.

“일단   제가   알아낸   정보는   여기까지예요.   덧붙여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에실리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테오라드의   양손이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심리적으로   내몰린   상태에서   엘프가   생각보다   더   엄청난   존재라는   걸   깨달았으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는   게   당연한   것이리라.

여기서   엘프에   관한   다른   말을   해줬다가는   테오라드가   자칫   공황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걸   원치   않았던   에실리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가방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짜잔!”

테오라드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약병을   바라보았다.   약병   안에는   푸른   액체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게   뭔가?”

“몸에   좋은   것들을   듬뿍   넣은   영양제에요.   고생하는   테오라드   경에게   드리려고   비싼   돈을   주고   샀답니다.”

“에실리…….”

별   거   아닌데.   테오라드가   감동하고   있으니   괜히   쑥스러웠다.

에실리가   테오라드의   손에   약병을   꼭   쥐어주고는   슬며시   웃었다.

“식사   전에   꼭   드셔야   해요?   그래야   약효가   좋거든요.”

“지금   마시면   되나?”

“그래주시면   좋고요.”

대답을   들은   테오라드가   약병의   뚜껑을   열고   입   안에   내용물을   들이부었다.

약이   조금   쓴   모양인지   테오라드가   미간을   찌푸린다.

“맛은   썩   좋지   못하군.”

“몸에   좋은   약은   원래   다   그런   법이죠.   그럼   저는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요.”

테오라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에실리가   고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습관적으로   손가방을   연   에실리는   저도   모르게   당황하고   말았다.

‘응……?’

손가방에   약병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내용물은   똑같이   푸른   액체가   넘실거렸지만   뚜껑은   연회색이었다.

연회색   뚜껑은   분명   영양제인데,   왜   영양제를   줬는데도   손가방에   그대로   들어가   있는   것인가?

곰곰이   생각하던   에실리는   예전에   맬던과   거래하러   온   드레메스에게   ‘악   성향을   증폭시키는   약’을   공짜로   받았던   것을   떠올렸다.

받기   싫다는데도   억지로   손에   쥐어주기에   손가방에   넣고   잊고   있었는데,   뚜껑을   착각하여   그걸   테오라드에게   먹여버린   것이다.

‘아,   안   돼……!’

테오라드를   위로하러   온   주제에,   도리어   테오라드를   곤란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지금쯤   약효가   퍼졌을   테니   종업원에게   패악을   부리고   있으리라.   당황한   에실리가   급하게   화장실을   뛰쳐나가자,   예상대로   저편에서   종업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테오라드가   보였다.

‘말려야   해……!’

아무리   인식   저해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다고   해도   대화가   오래   지속되면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채고   만다.

종업원이   패악을   부리는   손님의   정체가   테오라드라는   걸   깨닫는   순간,   안   좋은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테이블을   향해   급하게   걸어가던   에실리는   들려오는   말소리에   걸음을   점점   늦추었다.

“자네가   가져온   이   음식을   보아라.”

테오라드가   가리킨   테이블   위에는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마케로니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한   가닥의   머리카락이   소스   사이에   끼여   있는   게   보인다.

“머리카락이   보이는가?”

“아……!”

머리카락을   발견한   종업원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예전에   가신   기사와   함께   방문하였을   때에도   이런   실수를   저지르더니   또   반복하는군.   자고로   요리를   할   때에는   두건을   쓰는   게   당연하다.   주방이   더운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요리사로서의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   보상을   해드려야   할지…….”

“보상?   내가   지금   보상을   받겠다고   자네를   호출한   줄   아는가.   똑똑히   들어라.   다음에도   음식에   머리카락이   발견된다면   나는   이   가게의   주방장을   ‘멍청이’라고   부를   것이다.   알겠느냐.”

허리를   숙이고   있던   종업원이   다소   의아한   낯으로   테오라드를   살펴보았다.

“예?   방금   무어라   하신   것인지……?”

“귀가   먹었나.   멍청이라고   말할   것이라   하였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일컬어   ‘멍청이’라   지칭하는   것은   상당히   치욕적인   언사지.   그렇지   않은가?”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주방장에게   가서   말을   전해라.   다음에도   이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나는   너를   멍청이라   부를   것이라고.”

설마   그게   끝인가?   종업원이   테오라드의   눈치를   살폈으나,   테오라드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을   뿐이었다.

“용무는   끝났으니   그만   가보아라.”

“저,   정말   가   봐도   되겠습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말지.”

찌릿.   테오라드의   시선에   겁을   먹은   종업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덕분에   에실리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   속에서   손가방을   만지작거렸다.

‘어,   음…….’

신뢰를   기반으로   장사를   하는   드레메스가   전해준   약이   가짜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테오라드는   ‘악   성향을   증폭시키는   약’의   약효가   든   것이   분명할   텐데,   방금의   상황을   봐서는   도저히   해당   약을   먹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평소보다   말에   가시가   돋치기는   했으나   저건   정당한   불평이   아니던가.   오히려   일전에   가게에   왔을   때에   머리카락을   보고도   그냥   넘어갔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아무리   봐도   ‘악   성향이   증폭된   테오라드’의   모습은…….

‘그냥   평범하게   착한데……?’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테오라드가   약을   먹는다고   해서   천하의   쓰레기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신경질적이고   난폭한   사람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눈앞에   보이는   테오라드는   평소보다   말투가   조금   까칠하다   뿐이지   여전히   착하였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에실리가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테오라드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평소보다   날카로워진   눈매가   에실리를   지긋이   응시한다.

“뭐하나.”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귓전을   부드럽게   간지럽힌다.

“음식이   나왔으니   이리   와서   앉아라.   통로에   서서   종업원들을   방해하지   말고.”

“아.   네…….”

순순히   대답한   에실리가   테이블   앞에   앉았다.

테오라드는   에실리를   한   번   흘겨보고는   나이프를   들어   스테이크를   썰었다.

행동은   평소와   똑같았으나   분위기가   무언가   조금   다르다.

이전의   테오라드가   거만한   말투   속에   순수함을   담고   있었다면,   지금의   테오라드가   내뱉는   말에는   순수함이   어느   정도   마모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약효가   있긴   한가봐.’

내심   신기한   마음에   테오라드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자,   잘라낸   고기   조각을   입에   넣으려던   테오라드가   멈칫한다.

한심한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에실리에게   닿았다.

“너는   식사를   하러   온   게   맞나.”

흠칫   놀란   에실리가   급하게   나이프를   들었다.

“마,   맞아요.   식사,   식사해야죠.”

“그럼   멍하니   있지   말지.   바보처럼   보이지   않는가.”

쯧.   낮게   혀를   찬   테오라드가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는다.

덕분에   에실리는   풀이   죽은   채로   고기를   썰었다.   아무리   원래의   테오라드가   아니라지만,   바보라는   말이   조금은   아프게   다가온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잘못은   이쪽이   먼저   한   것이   맞았다.   에실리는   군말   없이   식사를   하였고,   침묵은   꽤나   오래   이어졌다.

“가만.”

스테이크를   절반   정도   먹어치웠을   무렵이었다.

나이프를   내려놓은   테오라드가   품에서   손수건을   하나   꺼내든다.

뭔가   싶어서   가만히   쳐다보자   테오라드가   상체를   숙이고   가볍게   팔을   뻗었다.

슥슥─

테오라드의   손에   잡힌   손수건이   에실리의   입가를   찬찬히   훑고   지나간다.

에실리의   입을   닦아낸   테오라드는   손수건을   두   번   접고는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음식의   잔여물을   입에   묻히고   다니지   마라.   칠칠치   못하다.”

“아.   죄송해요…….”

“당연히   죄송해야   할   것이다.   에실리,   너는   누구지?”

뜬금없는   질문이   당황스럽다.   에실리는   잠시   멋쩍게   있다가   대답했다.

“레오베르크   백작의   막내딸이자   펠가로인   가문의   일원이에요.”

“틀렸다.”

연갈색의   눈동자가   진실을   담은   것처럼   온화하게   좁혀졌다.

“너는   나의   약혼녀다.   장차   데하름   가문을   함께   이끌어갈   존재이기도   하지.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너는   나의   여자다.”

테오라드가   무신경하게   내뱉는   말들이   에실리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든   품위를   지켜라.   네   자신과   백작   각하의   위신은   물론이고,   장차   네   부군이   될   나의   명성에도   신경을   쓰라는   말이다.   알겠는가.”

“가,   갑자기   그런…….”

“싫은가?   싫다면   편히   네   의견을   말하도록   해라.   최대한   편의를   봐줄   것이니.”

에실리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싫을   리가   없지   않은가.   테오라드와   결혼하는   것은   옛날부터   꿈꿔오던   일이었는데…….

“좋다.   에실리   펠가로인.   혹여   오해할까봐   말해두겠다만,   네게만   의무를   지게   하려는   속셈은   아니다.   나   또한   너와   펠가로인   가문에   해가   되지   않게끔   품위에   신경을   쓸   터이니.   알아들었나?”

“네,   네에…….”

부끄러운   말을   연거푸   들으니   김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후   에실리는   최대한   테오라드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며   식사를   끝마쳤다.   대면하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아서였다.

식사를   끝낸   에실리와   테오라드는   가게에서   나와   거리를   돌아다니며   일종의   데이트를   즐겼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테오라드가   마신   약의   약효가   생각보다   오래   갔다는   것이다.

“명석한   줄   알았더니   이런   쪽에서는   영   솜씨가   없군.   자세가   그리   불안정해서야   과녁을   제대로   맞출   수나   있겠느냐.   내가   뒤에서   자세를   교정해   줄   터이니   그대로   따라하라.”

활을   제대로   쏘게   해준다면서   갑작스레   허리를   붙잡아   온다던가.

“내가   보기에는   이   귀걸이가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군.   너는   미색이   뛰어난   편이니   장식이   화려한   귀걸이는   오히려   독이다.   수수한   것이   더   어울리지.   이리로   와   보거라.”

장신구를   둘러보는   와중에   에실리의   옆머리를   귀   뒤편으로   넘겨주면서,   느긋하게   귀를   살펴보는   등의   기행을   보여주고   있어서   당황스러웠다.

“다른   남자에게   시선을   주지   마라.   네가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짜증이   난다.”

광대의   묘기를   구경하는   지금도   그렇다.   화려한   깃털   장식이   달려있는   모자를   쓴   남자가   신기해서   쳐다봤더니,   낮게   으르렁거리면서   질투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   그만해요……!’

덕분에   에실리는   난감하였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싫은   건   아니지만,   싫은   건   절대   아니지만……!

낯선   테오라드가   생각   이상으로   매력적인   터라   자칫   중독이   될   것만   같았다.   애써   호흡을   진정시킨   에실리가   테오라드를   밀어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테,   테오라드   경?”

“왜   그러지.”

“저어,   저기에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거든요?   제가   두   개   사서   가져올   테니   테오라드   경은   여기서   광대의   묘기를   구경하고   있어주겠어요?”

“그런   거라면   같이   가는   게…….”

“괜찮아요!   거리도   얼마   안   되니까   금방   갔다   올게요.   네?”

테오라드가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에실리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아이스크림   가판대로   걸음을   옮겼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인지라   인파가   꽤나   북적인다.

자연스레   맨   뒤편에   가서   줄을   선   에실리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바로   앞에   챙이   넓은   고깔모를   쓰고   있는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키는   평균보다   조금   작고……   정리되지   않아   흐트러진   검은   머릿결이   허리까지   길게   늘어진다.

‘드레메스?’

혹시나   싶어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뒤돌아   본   마녀가   표정을   찡그렸다.

“뭐야.   왜   어깨를   치고   지랄인데.   교단   새끼야   너?   시비   걸지   말고   가.   나   무서운   마녀야.”

“드레메스?   저예요.”

“네가   누군데?   짜증나게   하지   마.”

왜   못   알아보지?   드레메스가   맬던과   거래하러   백작성에   올   때마다   가끔   마주치곤   하였는데.

다소   의아하게   있던   에실리는   낮게   탄식을   내질렀다.   고양이   귀   머리띠가   인식   저해를   일으키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고양이   머리띠를   벗은   에실리가   배시시   웃어보였다.

“이제   아시겠어요?”

“응?   아…….”

사납게   일그러져   있던   드레메스의   표정이   온화하게   풀어진다.

“지고지순   아가씨구나.   여기는   웬   일이야.   이상한   마도구까지   쓰고   있던   걸   보면   아버지   몰래   데이트?   둘이서   섹스라도   하려는   거야?”

“그,   그런   건   아니에요.   저는   그냥…….”

“됐어.   농담이니까   너무   진지하게   대답하지   마.   그보다   내가   일전에   준   약은   써봤어?”

약이라면   쓰긴   썼다.   의도해서   쓴   건   아니지만…….

“네.   효과가   좋긴   하더라고요.   너무   좋아서   문제지만요.”

“그래?   그럼   몇   개   더   줄까?   인기   품목은   아니라서   재고가   남아돌거든.   네   약혼자처럼   호구가   아닌   이상에야   감당   못하는   약이라서.”

“드레메스!   테오라드   경은   호구   절대   아니에요……!   그냥   사람이   착할   뿐이라고요!”

“으엑.   농담   삼아   한   말인데   왜   그렇게   화내고   그래.   아무튼   약   더   필요해?”

에실리는   잠시   멈칫하였다.

드레메스에게   약을   더   받으면,   오늘   같은   테오라드를   내킬   때마다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공짜로   준다고   하니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하나   수락할   수   없었다.

“……괜찮아요.”

드레메스를   바라보는   에실리의   입가에   설익은   미소가   감돌았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평소의   테오라드니까요.”

*

제도(帝都),   황궁.

제국   제   3황녀,   군무재신(军务宰臣)의   집무실.

“악마가   따로   없군…….”

소파에   누워,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은   베넬리아가   미간을   좁히며   책을   덮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일렌이   기회다   싶어   말문을   열었다.

“황녀   전하.   보고드릴   것이…….”

베넬리아가   손을   들어   제지하였다.

“보고는   나중에   하라.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니.”

“예?   그게   무엇입니까?”

“지금부터   나는   둘째   오라비를   패   죽이는   상상을   해야   한다.”

그게   대체   어딜   봐서   보고보다   중요하단   소린가.

로일렌은   천장을   응시하며   누워있는   베넬리아에게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지만,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베넬리아는   엊그제   소집된   각료   회의에서   주전파들을   싸잡아   ‘민족의   반역자’라고   의견을   펼쳤다가   2황자인   레온하드에게   ‘겁쟁이’라는   힐난을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황제   폐하가   레온하드의   입장에   힘을   실어주어   베넬리아에게   당분간의   칩거를   명하였으니   화가   날만도   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황녀   전하께서   안배하신   일이   아니십니까.   주전파를   욕보이는   것으로   레온하드   황자   전하를   도발한   후   민심을   잡겠다고   하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황녀   전하이십니다.”

“그걸   누가   모르는가.   칩거도,   둘째   오라비가   나를   비난한   것도   모두   상정   내의   일이다.   하나   예상한   일이라고   하여   화가   안   나는   건   아니다.   로일렌   너도   내게   욕을   처먹을   걸   알면서도   매일   이곳에   방문하고   있으니   내   마음을   알   것인데.”

“말씀을   거두어주시지요.   저는   황녀   전하에게   쓴   소리를   들어도   전혀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건   내가   너의   인생을   부정할   정도의   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장을   응시하는   베넬리아의   금안에   차가운   분노가   들어섰다.

“오크   정벌   전쟁   당시,   열두   살에   불과했던   나는   천인대의   군권을   장악하고   최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분투했다.   그때   둘째   오라비는   무얼   했는가.   안전한   곳에   틀어박혀   향락을   즐겼었지.   그런   주제에   감히   나를   일컬어   겁쟁이라   하는가…….”

이가   빠득   갈린다.   당장이라도   그   역겨운   얼굴에   주먹을   꽂아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나   공허한   분노는   심력만   소모시킬   뿐이었다.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분노를   갈무리한   베넬리아가   몸을   일으켜   로일렌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네놈이   하려는   보고가   무엇이냐.”

“아.   인공   강우   마법의   개량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걸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또한   데하름   가문의   테오라드   자작을   치하할   금은보화가   모두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규모는?”

“금은보화를   가득   실은   마차가   한   대에,   말   열다섯   필과   혼자   쓴다면   평생을   사용해도   남을   비단을   준비하였습니다.”

“빈약하군.   내   사비를   들여서   금은보화를   실은   마차를   한   대   더   넣어라.”

로일렌이   주춤하였다.

“황녀   전하.   그리하면   출혈이   상당할   것입니다.”

“때로는   출혈을   감수하고서라도   인재를   영입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승냥이를   유혹할   고깃덩이로   어찌   늑대를   길들인단   말이냐.   잔말   말고   마차를   한대   더   넣어라.”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순   없었다.

로일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베넬리아가   로일렌의   발치에   책을   하나   집어던졌다.

책의   제목은   [공녀와의   은밀한   밀회]였다.   펼치지   않아도   안다.   이건   외설물이다.

“이   책의   저자를   잡아와라.”

“예?   혹여   황실을   모욕하는   내용이   담겨있기라도   한   것인지…….”

“그게   아니다.”

베넬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이   책을   접한   게   삼년   전이다.   당시에   인기작인지라   재상부의   초서관에게   부탁하여   구해달라고   하였지.   꽤나   명작이여서   이   년   전에도,   일   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읽을   정도다.”

그럼   문제가   없는   게   아닌가.

로일렌이   의아함   속에서   책을   주워들자   베넬리아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삼년   째   다음   권이   나오지   않는다.   대관절   이   책은   삼년   동안이나   마지막   권이   14권이란   소리다.   거기다   공녀와   용병의   애틋한   사랑이   결실을   맺는   부분에서   마지막   페이지가   끝나   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해   미칠   지경인데   다음   권이   나오지   않는다.   이건   나에   대한   기만이며   나아가   황실에   대한   기만이다.”

“황녀   전하……?”

“저자를   잡아와라.   죽지   않았다면   내가   죽여버릴   것이니.”

농인가   진심인가.   한참이나   고민하던   로일렌은   이게   베넬리아가   늘   하는   질   나쁜   농담들   중   하나라고   판단하였다.

“하하하.   꽤나   재미있는   농담이십니다.   깜빡   속아   넘어갈-”

“로일렌   정교수.”

그러나   농담이   아니었다.

“자네도   같이   죽고   싶은가?”

식은땀을   흘리던   로일렌이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   목숨과   명예를   걸고   잡아오겠나이다!”

에실리와   테오라드가   탄   마차가   떠나간   직후.

저택의   앞뜰에   홀로   남은   엘프가   아랫입술을   살며시   짓씹었다.

‘에실리   펠가로인.’

내뱉는   말이며   내비치는   기세를   보아하니   평범한   여자는   절대   아니었다.

본래   귀족의   여식이란   온실   속의   화초와   같아서,   조금만   상처를   주어도   자책하며   무너지기   십상인데도   에실리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더   표독스럽게   이쪽을   물고   늘어지지   않았던가.

귀족의   여식치고는   강단이   있었다.   그러나   감정적인   실책이었다.

‘테오라드를   좋아하고   있는   건가.’

응접실에서   나눈   대화는   테오라드를   좋아하고   있지   않다면,   진심으로   테오라드를   혐오하고   있다면   굳이   발끈할   필요가   없는   대목이었다.

하나   한쪽으로   단정   짓기에는   아직   단서가   그리   많지   않았다.

오늘   에실리가   테오라드와   마주하였을   때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으니까.

에실리는   이쪽을   욕보이며   고함을   지르고,   뺨을   맞더니   테오라드를   처벌하겠다며   데리고   나갔다.

혹여   그게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라면,   오늘   에실리가   대화도중에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발끈한   것이   ‘테오라드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노예의   건방짐에   대한   분노’라고   볼   수도   있는   거였으니까.

‘따라갈까?’

의심을   덜어내기   위해서는   따라가는   게   맞았다.

문제는   따라간다고   해도   결과는   크게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것이었다.

에실리가   보여준   모든   행동이   연기에   불과하였다면,   미행을   한다고   해도   그에   대한   대비를   철저하게   해놓았을   것이다.   물증을   잡을   수   없을   게   뻔했다.

반대로   진심이라면   딱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저   둘은   알아서   악화일로를   걸어   헤어지게   될   테니까.

‘흐음.’

고민하던   엘프는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에   구름   몇   점이   두둥실   떠다니는   게   보인다.   그   광경이   너무나   느긋하면서도   포근하여   저도   모르게   멍하니   있게   된다.

바람에   밀려   천천히   움직이는   뭉게구름을   따라   눈동자를   굴리던   엘프는   문득   푸딩을   떠올렸다.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달달한   것이   먹고   싶다는   무의식의   발현이었다.

‘테오라드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   같기도   하고.’

굳이   의미   없는   미행으로   시간을   버리는   것보다는   푸딩을   먹고   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엘프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쩌적─!

엘프의   바로   옆에   있던   공간이   균열을   일으키며   박살난다.

일그러진   공간에는   우주를   담은   것처럼   신비로운   어둠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엘프가   익숙한   것처럼   그   안에   들어간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균열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음.”

어둠에서   빠져나온   엘프는   자신의   옷을   한   번   둘러보았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개방형   로브와   짧은   치마,   소매   없는   윗옷에   굽   높은   신발이   엘프와   제법   잘   어울렸다.   여러   장신구가   붙어있는,   챙   넓은   고깔모   또한   예전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옷만   갈아입은   것이   아니었다.   찬연한   빛을   발하던   은발은   윤기어린   흑발이   되어   있었고,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는   흑연처럼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뾰족했던   귀   또한   인간처럼   짧아졌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엘프라고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모습은   오랜만이네.’

무언가   그리우면서도   씁쓸한   기분이   든다.   엘프는   허공에   고풍스러운   빗자루를   소환한   뒤   그   위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오랜만에   타는   거지만   감각은   여전하다.   엘프가   짧게   시동어를   외우자   빗자루는   돌풍을   일으키며   허공을   날았다.

“흐으응…….”

선선한   바람이   안면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좋다.

눈을   감은   채   날아가는   엘프의   가슴팍에서   보름달   형태의   배지가   가볍게   흔들린다.

[흑염(黑炎)의   마녀,   리야]

물론,   가명이었다.

*

엘프가   도착한   곳은   제국의   서부,   브레누   남작령에   위치한   푸딩   가게였다.

엘프가   마녀   행세를   하던   시절에   애용하던   가게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람이   없다.   가게의   한쪽   창에   난   가판대에는   파리만   날릴   뿐이었다.

‘뭐지?’

의아했던   엘프가   지상에   착지하여   빗자루에서   내렸다.

가판대에   가까이   다가가자   실눈을   뜨고   있던   수인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든다.

“리야님!?”

온몸에   털이   복슬복슬.   너구리를   닮은   수인이   눈을   끔뻑이다가   재차   말을   걸었다.

“정말   리야님이   맞는   건가용?   혹시   제가   꿈을   꾸는   게   아닌지…….”

“맞아,   너구리.”

“너구리가   아니라   라쿤이라니깐……!”

“여전하네.”

엘프가   퉁명스럽게   답하자   수인이   헛숨을   들이켰다.

“정말   리야님이   맞는   모양이네용.   거의   이십   년   만이신뎅…….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용?”

“푸딩   가게에   왜   왔겠어?”

“아아.   하지만   지금은   좀   곤란해용.   푸딩을   만들   수가   없어서…….”

“왜?”

“리야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푸딩을   만들   때   미노타우르스의   우유를   쓰잖아용.   그런데   최근에   미노타우르스의   우유를   조달하던   모험가   길드가   파업을   해버리는   바람에   공급이   막혀버리고   말았어용.”

어쩐지   가게가   휑하더라니.   무감정하게   가게의   안쪽을   훑어본   엘프가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넹?”

“우유   말고   다른   재료는?”

“아.   우유만   있으면   돼용.   다른   건   재고가   제법   남아있어서.”

“구해줄게.   위치   말해.”

수인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자그마치   이십   년   동안   모든   연락을   끊고   살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푸딩   재료를   구해주겠다니?

원래도   알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장사를   도와준다는데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잠깐만용.   가게   안에   암컷   미노타우르스가   서식하는   곳을   표시한   지도가   있을   거예용.”

뒤돌아   걸어간   수인이   수납장을   뒤적거리다가   양피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먼지를   툭툭   털어낸   수인은   지도가   확실한지   확인한   후   돌아와서   엘프에게   건네었다.

“여기용.   미노타우르스는   활동   범위가   넓으니까   꼼꼼히   찾아보셔야   할   거예용.”

양피지를   건네받은   엘프가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   볼일은   없다는   것처럼   빗자루에   걸터앉은   엘프는,   문득   드는   생각에   수인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모유로도   푸딩을   만들   수   있어?”

“넹?   아마?   해보진   않았지만   가능하긴   할   거예용.”

“평범한   인간이   먹어도   괜찮아?”

“아마도……?   주고   싶은   사람이라도   계신가용?”

잠시   고민하던   엘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후우웅!   돌풍을   일으킨   빗자루가   하늘   높이   떠오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인은   자신이   깜빡하고   말을   전하지   않은   게   있다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독월   조합에서   리야님을   찾고   있는뎅…….’

독월   조합이   만들어진   이유   중   하나는   행방불명된   흑염의   마녀,   리야를   찾는   것에   있었다.

리야가   모습을   감춘   지   이십   년이   지난   지금은   그   열의가   꽤나   시들해졌지만,   조합장인   드레메스는   아직도   리야를   수소문하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분명   살아계실   거라며.

‘뭐어…….   돌아오시면   말하면   되겠지용.’

미노타우르스는   상급   모험가도   단신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적수였지만,   리야가   미노타우르스   따위에게   질   리가   없을   것이다.   그녀에게   흑염의   마녀라는   명칭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

견습   마녀   패러스는   지금   인생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끄르르르르─!

졸업   과제로   붉은   뿔   괴조의   알을   가져오겠다고   말한   것까지는   좋았다.

괴조의   알   정도면   무난하게   인정받고   졸업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건   아니지.   분명히   수면   마법을   걸었는데   어떻게   깨어났단   말인가.

꿀꺽.

침을   삼킨   패러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에   들고   있는   알을   내려놓았다.

“가,   가져가려고   안   했어.   그냥   잘   자고   있는지   보려고   한   거야.   나는   이대로   떠날   테니까   걱정하지   마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헤어지자구.”

슬금슬금.   패러스는   뒷걸음치면서   괴조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러면서도   얼굴에는   억지   미소를   꾸준히   유지하였다.

상당히   포악한   놈인지라   흥분시키면   절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짓는   미소가   괴조에게   어떠한   상호작용을   할지는   미지수였지만   어쨌든.

“착하다   착해.   나   이제   간다?   갈   테니까   너도   거기서   가만히   있어주라.   응?   다시는   훔치러   오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괴조는   자신의   둥지에   침범한   인간을   돌려보낼   정도로   착하지   않았다.

끼에에에엙─!

날개를   홰친   괴조가   부리를   딱딱   부딪치며   뛰어오기   시작한다.   당황한   패러스는   비명을   내지르며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미안─!   미안하다고   했잖아악─!”

연거푸   사과를   내뱉어보지만   괴조가   들어줄   리   만무하였다.

때문에   패러스는   필사적으로   도망쳤으나,   가파른   내리막길은   사람의   관절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흐엑─!”

턱!   돌부리에   걸린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른다.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패러스의   몸이   땅바닥을   구르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몇   번이나   더   구른   몸이   나무   밑동에   처박혀   겨우내   멈춘다.

“아야야…….”

패러스는   주저앉은   채   엉덩이를   쓰다듬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거대한   그림자가   자신의   몸을   뒤덮은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엑…….”

괴조가.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망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마녀가   될   수   있는데.   내   집   마련의   꿈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는   건데.   배움에   비해   지독하게   비싼   학비를   힘들게   충당하던   과거를   보답   받을   수   있는데……!

이   망할   괴조   때문에   다   끝나버리고   말았다.   곧   허무하게   죽을   거라고   생각하니   영문   모를   분노가   속에서부터   끓어오른다.

“이   개   같은   괴조-”

퍼엉!

일순간   괴조의   머리통이   터지며   사방에   핏물을   흩뿌렸다.   머리를   잃은   괴조가   양옆으로   휘청거리다가   바닥에   몸을   처박고   쓰러진다.

깜짝   놀란   패러스가   몸을   움찔   떨고   있자,   그   앞으로   의문의   마녀가   검은색   로브를   휘날리며   차분하게   걸어왔다.

“너.”

패러스가   두려움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햇볕을   등지고   있는   마녀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마녀는   대뜸   지도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미노타우르스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여기   근처인데.”

“네?   미노타우르스라면…….”

멍하니   대답하던   패러스의   시야에   마녀의   배지가   들어온다.   [흑염의   마녀,   리야]라고   적혀있는   보름달   형태의   배지가   패러스의   기분을   언짢게   만들었다.

“잠시만요!   구해주신   건   정말   고맙고   사례도   해드릴   건데,   사칭은   하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사칭?”

“이거   왜   이러실까.   흑염의   마녀님이   저희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존재라는   건   어린애도   아는   사실인데.   그리고   흑염의   마녀님은   저한테도   영웅이나   마찬가지인   분이라고요.   그런   분을   함부로   사칭하는   건   도의적으로   아니라고   생각해요.”

“미안하지만   내가   흑염의   마녀야.”

“하?   차라리   우리   집   똥개가   흑염의   마녀라고   하세요.   그편이   더   신빙성   있겠다.”

비아냥거리는   패러스를   보니   짜증이   난다.   아무래도   말로   설득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으니   간단하게   예시를   들어주는   편이   나아보았다.

엘프가   손을   들어   뒤편의   괴조를   가리켰다.

“보여?”

괴조는   왜?   패러스가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는데요?”

“저   괴조랑   너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해?”

“네?   괴조는   머리통이   박살나있고   저는…….”

거기까지   말한   순간,   패러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엘프를   올려다보았다.

엘프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걸린다.

“알아들었지?”

거절의   여지가   없다.

공포에   휩싸인   패러스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의   협박에   굴복한   패러스는   미노타우르스   탐색에   일조하였다.

실습수업   때   이따금   온   적이   있는   산이니만큼   근처   지리는   훤했으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붙는   엘프   때문인지   자꾸만   긴장이   된다.

‘꼭   성질   나쁜   교수님   같네…….’

속으로   구시렁거린   패러스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엘프를   돌아보았다.

“이,   이쪽   방면으로   쭉   가면   있을   거예요.”

“확실해?”

“아마도요……?”

“아마도?”

단지   되묻는   것뿐인데   모종의   살기가   흘러나와   등허리를   오싹하게   만든다.   땀을   삐질   흘린   패러스가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화,   확실합니다!   저만   따라오세요!”

“진작   그렇게   말해야지.”

툭   내뱉은   말이   경고처럼   들려온다.   만약   내가   미노타우르스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괴조처럼   머리가   터지는   게   아닐까…….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패러스가   공포감   속에서   열심히   지도를   들여다보는   와중,   걷는   게   지루했던   엘프가   무미건조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너는   마녀야?”

흠칫   놀란   패러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색다른   협박인가   싶었지만   저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보아하니   진심으로   궁금해서   한   질문으로   보였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패러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아하하   웃어보였다.

“아직은   아니에요.   교수님을   통해   인주(印呪)를   맺지   않았으니까요.   학점을   다   채우고   졸업   과제를   선택해서   완수하고,   따로   논문까지   작성해야지만   정식으로   마녀가   될   수   있어요.”

“그래?   절차가   제법   까다로워졌네.   내가   활동할   때만   해도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진   않았는데.”

“그야…….   옛날이야   마녀가   박해받았다지만   요즘은   유망   직종이니까요?   마녀가   되면   외견이   고정돼서   늙지도   않고,   신분상   독립적인   위치라서   귀족한테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잖아요.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죠.”

엘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득만   있는   건   아닐   텐데.   너희   마녀들은   늙지   않는   대가로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잖아.   거기다   외견상   젊음을   유지할   뿐이지   인간들과   수명은   똑같고.”

“괜찮아요.”

“뭐가   괜찮은데?”

“어차피   저는   결혼할   생각   없어요~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결혼은   무슨…….   내   인생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인데   애를   어떻게   키워요?   인정?”

인정?   말이   좀   짧은   것   같은데.   엘프가   두   눈을   가늘게   좁히자,   패러스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마녀님은   조금   아깝기는   하겠다.   아까   보니   실력이   엄청나시던데.   돈   많이   버셨을   테니   아이도   가지고   싶으실   거   아니에요?”

“원한다면   지금도   가질   수   있어.”

“네?   마녀가   어떻게   아이를   가져요?”

“나는   마녀가   아니야.”

패러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아까는   흑염의   마녀라고   하셨잖아요?”

“그건   맞아.”

“그럼   마녀가   맞잖아요?”

“틀려.   마녀   행세를   한   거니까.”

뭔   개소리지?   패러스는   이해가   조금도   되지   않았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굳이   물고   늘어져서   분위기를   나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부럽네요.   저도   마녀님처럼   돈   많이   벌면   제도에서   떵떵거리면서   살고   싶은데.   마녀님   같이   강하신   분이면   분명   커다란   저택에서   살고   계시겠죠?”

“저택…….”

틀린   말은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패러스의   눈이   기대감으로   빛난다.

“역시!   그러면   막   서재   같은   것도   있고,   비싼   애완동물도   기르고   그래요?”

“애완동물?”

곰곰이   생각하던   엘프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키우고   있어.”

“오오.   고양이에요?   역시   마녀하면   고양이가   어울리잖아요.”

“고양이……?   음.   굳이   말하자면   강아지에   가까운데.”

“아아.   강아지도   나쁘진   않죠.   교육은   잘   시키셨나요?”

“시키고   있어.   말은   잘   안   듣지만.”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패러스가   별안간   푸흐흐   웃어보였다.   왜   저러지?   엘프가   의아함을   담아   물었다.

“왜   웃어.”

“그냥요.   강아지   이야기를   하실   때   꽤나   즐거워하시기에.   마녀님이   엄청   무서운   사람은   아니구나   싶어서요.”

“거짓말.”

“제가   왜   거짓말을   해요?   오히려   거짓말은   마녀님이   하고   계시잖아요.   언제까지   흑염의   마녀님인   척   하실   거예요?”

엘프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맞다고   몇   번을   말하지?”

“에게.   그럼   그거   보여주세요.   이름하야~   광풍흑살창(狂风黑杀枪)!”

갑자기   온몸에   닭살이   돋는다.   엘프가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그게.”

“네?   흑염의   마녀님이   교단의   마녀   사냥에   대항하실   때   자주   쓰셨던   마법이잖아요.   이거   엄청   유명해서   기초   교습   과목에도   실려   있는   건데.”

“나는   그딴   이름   붙인   적   없어.”

“어…….   독월   조합장님이   기술   이름이   이게   맞다고   하셨는데요?”

“드레메스가?”

끄덕끄덕.   패러스의   긍정에   엘프는   골이   아파오는   걸   느꼈다.   남이   쓴   마법을   흑역사로   박제해놓은   건   대체   뭐하자는   짓인가.

개소리를   진실이라고   알고   있으면   곤란하다.   엘프가   무어라   말이라도   덧붙이려고   입을   벌린   찰나,   쉿─   패러스가   입술에   검지를   얹으며   수풀   너머의   공터를   가리켰다.

공터에는   자그마치   4m에   달하는   미노타우르스가   산양을   물어뜯고   있었다.

“말씀하신   암컷   미노타우르스에요.   상당히   흉폭하고   강하기   때문에   저랑   마녀님이랑   힘을   합쳐서……   엇,   저기요?   제   말   안   들리세요?”

엘프는   패러스의   조언을   무시하고   공터로   나아갔다.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크르륵……?

인기척을   느낀   미노타우르스가   고개를   치켜들었으나,   엘프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패러스가   보기에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멈춰─”

엘프를   말리려던   패러스는   멈칫하고   말았다.

엘프의   뒤편에서,   흑색의   마법진이   수많은   회로를   이어가며   전개(全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뭐야?’

수많은   회로가   일정한   규칙을   가진   채   이어지고,   문양이   불타오르며,   영문   모를   기호가   각자의   위치에서   마력을   증폭시켰다.

복잡하나   때로는   간결하고,   거대하면서도   정밀하게   맞물린다.   그   압도적인   광경   앞에서   패러스는   경악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완드도   갖추지   않았고,   마법   발현을   도와주는   보조   마녀가   있는   것도   아닌데도   저만한   대마법을   순식간에   완성시키는   기예가   이해가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크아아아아악─!

위기감을   느낀   미노타우르스가   산양을   놓고   달려든   순간,   엘프가   마법을   완성시켰다.   마법진의   중앙부에서   거대한   창날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빛이   점멸했다.

파앙─!

총탄처럼   쏘아진   흑색의   창이   미노타우르스의   몸을   꿰뚫고   바닥에   처박혔다.   콰아앙!   땅거죽이   뒤집히고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지면이   세차게   흔들린다.   동시에   거친   돌풍이   사방에   휘몰아쳤다.

쿠구궁……!

거대한   충격이   산지를   뒤덮어가자,   깜짝   놀란   새떼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른다.

“흐윽!”

마법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패러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눈을   꾹   감은   채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던   패러스가   얼마   후   천천히   눈을   뜨자,   자신의   몸에   필적하는   흑색의   창에   몸이   꿰뚫린   채   죽어있는   미노타우르스가   보였다.

그야말로   찰나의   절명이었을   것이다.   녀석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였으니까.

“허어…….”

격의   차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패러스는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얼떨떨하게   굳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은   정말로   흑염의   마녀인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   로브자락을   펄럭이며   서   있는   마녀의   모습이   새삼   고고하게   느껴진다.

“어,   음.”

뒤늦게   정신을   차린   패러스는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엘프에게   다가갔다.

“저기.   호,   혹시   정말로   흑염의   마녀님이세요?   교단의   마녀   사냥에   대항하여   전쟁의   종지부를   찍으신?”

고개를   돌린   엘프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맞아.”

“그,   그럼   왜   이십   년   동안   종적을   감추신   건지……?”

“너희도   결국에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러나   엘프는   네   의문에   관심이   없다는   듯   주변에   커다란   양동이   몇   개를   소환해서   턱짓으로   가리켰다.

“사례.”

“넹?”

“너,   나한테   사례한다고   했어.   그러니까   우유   짜와.”

“아…….”

조금   뜬금없지만   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거기다   눈앞의   마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흑염의   마녀다.   존경하는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니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만,   약소한   이기심이   고개를   치켜드는   것은   막지   못하였다.

“그런데   우유   한   병   정도는   제가   가져도   될까요?   졸업   과제로   가져가면   대박일   거   같은데…….”

엘프는   마뜩찮게   고개를   끄덕였고,   덕분에   패러스는   즐거운   기분으로   착유에   임했다.

*

착유를   끝낸   엘프는   패러스를   돌려보내고   곧장   푸딩   가게로   돌아왔다.

“오옹…….”

덕분에   푸딩   가게의   주인인   수인은   눈앞의   광경에   감탄을   머금었다.

자그마치   다섯   개의   양동이에   미노타우르스의   우유가   가득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이리도   빨리   가져와주실지는   몰랐는데용.   역시   흑염의   마녀님이십니당!”

“됐으니까   푸딩이나   만들어.”

“네엥!   세   시간   정도   걸리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세용!”

힘차게   대답한   수인이   양동이를   양손으로   들어   가게로   옮긴다.

뒤뚱뒤뚱   움직이는   꼴이   어수룩해서   보고   있기가   힘겹다.

그건   그렇고   세   시간이라니.   푸딩   하나   먹자고   시간을   너무   낭비하는   것   같아서   괜스레   불쾌해진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푸딩을   안   받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맛있으니까,   여기.’

예전에   감탄했던   맛을   다시   느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엘프가   가판대   앞의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죽이고   있자,   조리를   끝내고   푸딩을   냉동고에   넣은   수인이   손을   닦으며   다가왔다.

“리야님!   이제   두   시간   정도만   더   기다리면   돼용.”

“응.”

짧은   대답이   익숙하다.   흐흐   웃은   수인이   엘프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동안   뭐하고   계셨어용?   독월   조합에서   찾고   있던뎅.”

“독월   조합에서?”

“넹.   특히   드레메스가   아직도   리야님을   찾아내야   한다고   열성이에용.”

“그래.”

표정에   변화가   없다.   잠시   멋쩍게   있던   수인이   말을   이었다.

“조합에   돌아가실   생각은   없으세용?”

“없어.”

“그렇군용…….”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예전에는,   적어도   이십   년   전에는   이정도로   차가운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십   년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던   건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머뭇거리던   수인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아참!   푸딩은   먹고   가실   건가용?”

“포장해.   가지고   갈   거니까.”

“아하.   그럼   몇   개나   가져가실   건가용?”

“두   개를…….”

마음이   바뀌었다.   지금쯤   에실리와   즐겁게   놀고   있을   테오라드를   굳이   챙겨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아니.   하나만   줘.”

그래도   여지는   남겨두고   싶었기에,   엘프가   수인을   돌아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중에   아는   사람을   데리고   올   수도   있어.   그때도   먹을   거니까   다른   길드를   찾아서라도   우유는   제때   조달해.”

“으음.   어렵겠지만   한   번   찾아보겠습니당.   그런데   다른   사람이라면,   혹시   리야님이   사랑하시는   분인가용?”

“아니.”

즉답이다.

머쓱했던   수인이   재차   말했다.

“그럼   좋아하는   사람인가용?”

이번에도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엘프의   입이   잠시   멈춘다.

수인이   내뱉은   말을   제대로   정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생각하던   엘프는,   불어오는   실바람에   눈을   감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글쎄.”

그   순간   수인은   볼   수   있었다.

무표정으로   일관했던   엘프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약한   미소가   감도는   것을.

“여기에요!   여기에요   교수님!”

저편에서,   빗자루를   탄   패러스가   잔뜩   흥분해서는   손을   흔든다.

패러스의   마나와   공명한   빗자루가   위아래로   흔들리는   모습이   왜인지   꼴사납게   느껴진다.

“패러스.   내가   호들갑   떨지   말랬지.”

못마땅하게   혀를   찬   루이커스가   느긋한   비행으로   다가갔다.

‘흑염의   마녀님을   봤다니,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학술   강연   준비는   물론이고   사설   용병단   운영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와중에,   졸업   과제를   수행하고   오겠다던   패러스가   연구실에   대뜸   찾아와서는   ‘흑염의   마녀님을   찾았어요!’   라는   소리를   지껄였다.

처음에는   황당했고   나중에는   화가   났다.   흑염의   마녀님이   실종된   지   벌써   20년이란   시간이   흘렀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으니까.

그러나   패러스의   두   눈에   담긴   감정은   거짓   없는   확신이었다.

긴가민가하던   루이커스는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패러스를   따라나섰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전조도   없이   다시   나타나셨을   리가   없잖아.’

협회의   장로들께서   흑염의   마녀가   사망했을   거라고   판단한지가   벌써   10년   전이다.   덕분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마녀들이   흑염의   마녀를   고인   취급하고   있었다.

그래서   독월   조합장인   드레메스와   같은   몇몇   별종들을   제외하면   흑염의   마녀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마녀는   없었다.

루이커스   또한   별종이   아니었기에   흑염의   마녀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사인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수명이   다한   마녀들은   저도   모르게   객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마녀란   그런   족속이니까.’

죽기   직전까지도   건강한   몸과   젊은   외견을   유지하는   마녀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수명이   언제까지   이어지는지   알지   못한다.

인주(印呪)를   통한   개성   마법,   일명   ‘운명의   고리’에   엮인   마녀는   자신에게   예정된   수명이   다하는   순간   실   끊어진   인형처럼   픽   죽어버리고   마는   법이니까.

극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전날에   격렬한   사랑을   나눴던   연인이   다음날   아침에   뜬금없이   시체로   발견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인과를   거스른   벌이겠지.’

자신에게   예정된   죽음이   언제인지   알   수   없으며,   예정된   죽음을   피할   수도   없는,   운명의   꼭두각시가   바로   마녀란   족속이었다.

제아무리   강대한   힘을   사용했던   흑염의   마녀라고   해도   ‘마녀’라는   운명에   저항하지   못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

패러스가   가리킨   공터.

지면을   내려다본   루이커스의   동공이   놀라움에   확장된다.

“이게,   어떻게…….”

미노타우르스의   거체에   박혀있는   흑색의   창에   고고한   마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산을   빼곡하게   뒤덮은   교목의   키를   뛰어넘을   정도로   거대한   창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광풍흑살창(狂风黑杀枪)이었다.

“제   말이   맞죠?   흑염의   마녀님을   만났다니까요.”

기세등등한   패러스의   말에   루이커스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는   모양이야.   흑염의   마녀님은   멀쩡히   살아계셨어.”

운명을   거스르는   것에   성공하신   건지,   단순히   종적을   감추었다가   다시   나타난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건   마녀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킬만한   중대사였다…….

*

저택에   돌아온   엘프는   메이드   정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식당에   들어섰다.

푸딩을   먹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곧   저녁시간대라   주방장을   도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푸딩   상자를   식당의   식탁   위에   놓고,   식당   옆에   마련된   주방에   들어가자   턱을   쓰다듬으며   고심하고   있는   주방장이   보였다.   오늘   저녁으로   뭘   만들지   생각하고   있는   티가   역력하다.

“주방장님.”

흠칫   놀란   주방장이   엘프를   돌아본다.   엘프가   순진하게   눈을   깜빡거리자   주방장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너였구나.   오늘도   요리를   도와주려고?”

“원하신다면요.”

“흐흐.   괜찮다   욘석아.   네가   요리를   잘하기는   한다지만,   너에게   의지하기만   하면   내   실력이   퇴보하지   않더냐.   오늘은   푹   쉬도록   해라.”

“그렇게   말하신다면…….   그런데   오늘   저녁   요리는   정하셨나요?”

“아니.   그래서   지금   고민   중이다.   어떤   요리를   내놓아야   가주님께서   만족하실지…….”

괜한   고민이었다.   착해빠진   테오라드라면   어떤   요리를   내놓아도   다   맛있다고   할   테니까.

그래도   실력을   정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무어라   조언이라도   해줄까   싶던   엘프는,   문득   드는   생각에   말문을   열었다.

“크림   파스타를   준비하는   게   어때요?”

“크림   파스타?”

흐음.   턱을   툭툭   두드리던   주방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크림   파스타는   우유가   생명인데,   신선한   우유가   없어서   곤란해.”

“우유라면   있어요.”

정확히는   우유가   아니라   모유지만.

사정을   모르는   주방장은   우유가   있다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있다고?”

“네.   제가   양동이에   담아서   냉동고   깊숙한   곳에   넣어놨는데.   못   보셨나   봐요?”

“어…….   그러고   보니   양동이를   본   것   같기도   하구나.   우유는   언제   준비한   것이냐?”

“그게,   며칠   전에   주인님이랑   같이   만들었어요.”

“가주님이랑?   둘이서   젖소   농장에라도   들린   모양이구나.”

주방장은   별   뜻   없이   내뱉은   말이겠지만   괜히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네에…….   맞아요.”

“갑자기   얼굴은   왜   붉히는…….   아무튼   알았다.   네가   가져온   우유로   크림   파스타를   한   번   만들어보마.”

“네.   그럼   저는   잠시만   쉬고   있을게요.”

“그러려무나.”

고개를   꾸벅   숙인   엘프는   주방에서   나와   식당의   식탁으로   다가갔다.   고생해서   가져온   푸딩을   먹기   위해서였다.

의자에   앉은   후   식탁   위에   놓인   푸딩   상자의   포장을   뜯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푸딩이   먹음직스러움   자태를   드러내었다.

절로   군침이   돌   정도로   완벽한   모양이었다.

‘맛있겠어.’

상자에   동봉되어   있는   수저를   들어   푸딩을   한   입   퍼먹으려던   손이   멈칫한다.   고생해서   가져온   건데   조금은   사치를   부려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홍차랑   같이   먹을까.’

노예가   홍차를   먹는다는   건   본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나,   주방   일을   보조하면서   친분이   쌓인   주방장이라면   허락해줄   확률이   높았다.

생각을   마친   엘프는   의자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미식을   즐기는   것이니만큼   제대로   준비해서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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